[시니어 에세이] 봄 바바리

매장 아가씨가 막무가내로 내 몸 위에 바바리를 입힌다. 나도 못 이기는 체 입고 거울 앞에 선다. 지나가다가 붉은색에 이끌려 얼마냐고 물어 본 게 화근이다. 백화점 식당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시간이 좀 일러 매장을 둘러보다가 마음이 낚이니 지갑에서 신용카드가 재빨리 걸어 나온다.

통통한 것을 지나 뚱뚱하기까지 한 내 몸매에 착 감긴 빨간 바바리는 나를 한 치수는 더 날씬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간혹 모임에 나온 친구가 입은 바바리는 왜 그리 멋지던지 늘 나도 그런 멋진 바바리 한 번쯤 갖고 싶었다. 그런데 내 몸에 걸쳐진 바바리는 나를 대여섯 살이나 어려 보이게 함과 동시에 날씬하게 하고 가격 또한 적당했으니 안 사고 어찌 지나치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 쇼핑백에 담긴 옷을 남이 볼세라 슬금슬금 눈치 보며 만져보고 살짝 꺼내도 보며 멋진 내 모습을 생각하며 환상에 젖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바리를 입고 안방 거울 앞에 섰다. 그 순간 바바리는, 날씬하고 아름답게, 젊어 보이게 한 모습은 간데없고 어둡고 칙칙한 몸매 위에 튀는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백화점 거울에 비치던 세련되고 화사했던 여인은 어느새 뚱뚱한 몸매를 그대로 보여주며 나의 초라함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이 오늘뿐만이 아니다. 백화점 안에서 마네킹의 입은 근사한 옷에 매혹되어 내가 걸쳐 입고 바라본 백화점 거울은 그 옷을 사서 발걸음도 가볍게 백화점 문을 나서게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옷을 입고 안방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면 날씬하고 세련되어 보이던 모습은 간데없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아줌마가 제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고 서 있기 일 수였다.

백화점 안의 마법의 거울. 그 앞에 서면 내가 나를 잊고 눈이 멀고 혼이 빠져나간다. 시장에 가서 돈 천 원에도 발발 떨며 물건 값을 깎다가 어쩌자고 백화점에만 가면 만 원이고 십만 원이고 돈의 가치가 그토록 하락하는지, 마법도 이런 마법이 없다. 돌아서면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또 저지르니 어디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대낮인데도 안방의 불을 켜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붉은 바바리가 까르르 숨넘어가게 웃는다. ‘다시 쳐다보아야 달라질 게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붉은 바바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바바리가 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거나 죽어있거나 사물들에게도 어쩌면 선택권이 주어져서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고 사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꼬마리라는 풀이 있다. 어려서는 도깨비풀이라고도 불렀다. 가을 들길을 걷다보면 어김없이 바짓가랑이나 옷자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풀이다. 그리하여 도꼬마리는 살던 곳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상가들의 매장 안에 있는 물건들이 우리를 반짝이며 유혹하는 이유도 그렇게 해야만 그 곳을 벗어날 수 있기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파를 보내는 게 아닐까 싶다.

세상에 모든 것들이 생명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다 이렇게 자기를 끌어당기라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아니 척 하면서 속내를 감추고 추파를 던지고 유혹을 하며 세상을 향해 손짓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간다. 그 게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당겨 지는 자가 이끌려가기 마련이다. 이 봄엔 또 무엇이 날 유혹하여 황홀경에 빠트릴지 자못 가슴이 두근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