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세 장작골 할매가 그려낸 화폭 위 童話

2009년 강릉원주대 미술학과 차영규(67) 명예교수는 아내와 함께 강릉시 강동면 장작골에 터를 잡았다. 30년 교수 생활을 한 서울 토박이가 정년을 서너 해 앞두고 내린 결정이다. 2012년 어느 날 이웃 정하교(77) 할머니가 "감자전 먹으러 오라"고 했다. 교수는 감자전을 먹다가 구석에 놓인 달력에 눈이 갔다. 달력 뒷면에 할머니가 연필로 그린 꽃 그림이 빼곡했다.

"집 안 화초들을 스케치했는데 표현이 정말 재밌었어요.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림이었죠." 차 교수는 한달음에 집으로 가 스케치북과 4B연필을 가져다주었다. 장작골에는 이렇게 사제(師弟)가 생겼다.

지난달 9일 강릉미술관 전시실. 다리가 불편해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살구색 한복의 할머니가 방문객들을 맞았다. 전시 제목은 '장작골 정하교 할머니 생활그림전'. 할머니 정하교의 데뷔전이다.

2012년 그날 스케치북을 건넨 후 차 교수는 주 1회 할머니 집으로 가 강의했다. 호칭은 '아주머님'과 '교수님'. "화분을 잘 그리셨네요. 이번에는 저기 산과 풍경을 그려보시면 어때요?" 할머니는 다음 강의면 어김없이 '과제물'을 제출했다. 얼마 뒤엔 수채화 물감과 팔레트, 붓이 건네졌다. "봄이잖아요. 나비를 그려보실래요?" 이렇게 스케치북에 노란 나비가, 붉은 꽃이, 푸른 소나무가 채워졌다. 스케치북이 떨어지면 할머니는 택시를 불러 읍내 문방구로 달려갔다. "안사람이 점심도 거르고 그림만 그려요. 내가 밥하고 설거지 다 해요." 남편 김영길(80) 할아버지의 말이다. 지난 연말 차 교수는 "이제 전시회 한번 준비해보자"고 했다. 할머니는 "이 그림으로 무슨 전시냐"는 할아버지 말에 동의했지만 이후 더 열심히 그림에 매달렸다.

강릉 농사꾼의 둘째 딸인 할머니는 스물넷에 장작골에 시집와 1남4녀를 뒀다. 장작골에는 70세를 넘긴 노인들뿐이다. 16가구가 눈 녹으면 감자 심고 때 되면 고추·콩·깨도 심는다.

전시회에는 사제가 고르고 고른 16점이 걸렸다. 제목은 '새들의 가족' '소야 놀자' '동물가족' '소나무 위에 앉자' 등이다. 할머니가 보았거나 상상한 풍경, 새와 나무, 꽃들이 담겼다. 밭을 가는 소 위로 화분과 나비가 놓이고, 원근(遠近)도 무시한 파격 구성이다. 할머니는 "꽃이 그냥 여기 있으면 좋겠다. 이러면 예쁘겠다 싶어서 그려 넣은 것"이라고 했다. 차 교수는 "어려운 표현 없이, 할머니만의 순수한 이미지로 가득하다"며 "할머니 아니고선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그림들"이라고 했다.

3년 전 할머니는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2002년 태풍 루사로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할머니는 다리를 다쳤다. 오밤중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다리를 절면서 농사를 거들었지만 3년 전부터는 보조기구 없인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집에 갇힌 무료함 속에 우연히 연필을 잡았다. "그림을 그리니 답답했던 마음이 확 열리는 거야. 하나하나 보기 좋고 재밌었어. 그림은 시시한 게 아니야."

전시회에는 강릉 사는 아들딸 내외와 주민들이 왔다. 셋째 딸 미복(46)씨는 눈물을 쏟았다. "우리 엄마 그림 배웠으면 화가 됐을 텐데, 엄마가 이런 소질이 있었네…." 화가가 꿈이라는 손녀딸 신예원(6)양은 "동화 나라에 온 것 같다"고 했다. 동네 친구들은 "그림 그린다는 얘긴 들었어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우린 꿈도 못 꾸겠네"라고 했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할머니는 그림마다 사인을 그려넣었다. '2014년 정하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