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우스갯소리로 들었던 말이 있었다. 살아가면서 병원과 법원에 안 가고 살 수 있으면 편하다는 말. 특히, 병원보다 법원에 가지 않을수록 더 행복한 듯하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그것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크다. 이제 지난 추억 같은 것이 되었다.
법 근처에는 가도 무덤덤해리라 생각한 일도 이제는 지나간 법원의 지나간 마음 흠집 하나 더 없애야 조금이나마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기억을 들추는 것이 순서일 것. 아마 10년 가까이 되었을 그날의 이 기억, 부당해고라고 생각한 전 직장과의 불편함을 법원에 알리러 갔던 날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새로 지은 법원 건물 사이 돌 징검다리 잔디밭에 실컷 깔아 지르밟았다. 오래 밟을수록 멍멍해지는 이유를 모른 채, 빌딩 마천루 구름보다 느리게 서초동 법원 문을 나섰다. 무심코 치켜든 눈길이었지만, 큰길 너머 맞은편이 더 크게 느껴졌다.
기억하건대, 삼풍백화점이 왼편에 있었던 것. 언덕 위의 넓은 주차장은 2000년도 전후 몇 년간 심상 해변시인학교 출발의 집합장소였었고, 지금은 대형 오피스텔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거대한 빌딩 아래 신호등에 하필 걸린 내 모습이 초라했을까? 지나고 나니, 그날은 참 쓸데없는 생각을 구시렁거리며 했었던 같다.
신호등이 바뀌면 나는 건널 것이다. 그것이 법이다. 그러나 바뀌기 전, 남자 셋이 길을 뛰어 건넌다. 남보란 듯, 자랑스럽게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다. 법? 크크크, 힘을 합해 무엇인가 행동하면 그것이 법이 되는 거 모르나? 순간 신호등이 바뀌었다.
그냥 서서 빌딩 꼭대기에 걸린 구름을 본다. 구름 따라 흐르는 시선 위로 슬픈 것도 억울한 것도 누구의 탓이 아니라는 소리가 울린다. 과연 누가 들으라고 울리는 것일까. 아마, 그 남자들에게는 기쁜 것으로 자랑스러운 것으로 들릴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이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 공평한 것이니까. 물론 불공평 공평은 자본주의 힘의 논리에 기인한 것이니까.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어느 경우든 죄란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법, 그래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기 위해 또 다른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것.
그렇게 악순환의 고리에 묶여 쓰러지는 사람은 이 세상 절반은 되리라는 이 또한 진리인 것. 절반이 맞으면 반드시 절반을 틀리게 되는 법이니까. 그것이 역사였으니까. 그 절반은 자기 것이니까, 생존해 있어야 하니까. 대법원 패소로 끝난, 굳이 지난 위의 기억을 들추어낸 것은 더 이상 아프지 않기 위함이다.
지금은 고운 정 미운 정이 든 전 직장의 새 임원들로 교체되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가장 가깝게 함께 근무했던 전 직장동료가 쫓겨나듯 나와 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또한 세 번째 직업을 바꾸었다는 스스로 위안으로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계속 맺어가고 있다. 그런 것 같다. 새롭다는 걸 느끼는 것이 곧 나 자신을 계속 발견하는 일이란 것. 그래야 사람들이 더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란 것.
애써서라도, 주말이나 노는 날은 병원이나 법원 근처보다 산이든 들이든 나가봐야겠다. 나이 들수록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을 만나고 싶어지는 지금이다. 과연 도피인가 피난인가 따지게 되는, 그 결론은 비겁한 일이겠거니와, 이 또한, 누구나 그러한, 한강의 모래알 같은 고만고만한 일의 연속 아닐까?
그래도 물가에라도 가보고 싶으니, 사람이 만든 법이 아닌 자연 속에 몸을 맡기고 싶어지는 일, 잠시나마 마음 흠집 지우는 일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제 불법이든 합법이든, 어떠한 결론에도 한 번은 자유로워지고 싶어졌다. 계속 그리하고 싶은 것은 결국 60이란 나이를 눈앞에 둔 탓일까?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 마음 흠집 하나 살짝 지워봤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