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홀로 고난과 마주섰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소설가 엄창석(53)의 새 장편 '빨간 염소들의 거리'(민음사)는 독자를 1970년대 말 대구로 데려간다. 소설 속 대구 풍경이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본 듯 생생하다. 작가가 다녔던 대구중앙중학교, 신천(新川) 변 골목길과 송라시장, 지금은 대구기상대로 바뀐 옛 측후소에 오밀조밀 들어섰던 편백나무 숲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작가는 "70년대 대구는 소설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제 중학시절 얘기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성장소설을 쓸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10대의 한 시절로 돌아가, 감수성이 가장 날카로웠던 시기에 아이들 눈에 비친 세상과 그 세상에 반응하는 소년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려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형주는 기차를 타고 집에 가다가 철로 탈선 사고로 어깨를 다쳐 경북대병원에 입원한다. 공부 잘하던 우등생 소년은 이 사고를 계기로 다른 사람이 된다. 1m만 비켜서 있었어도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란 자각이 그에게 막 살아버리고 싶은 자기 파괴 욕구를 자극한다. 이전에는 몰랐던 이 감정이 두렵고도 달콤해 그는 혼란스러웠다.

이런 변화는 1970년대 대구의 구체적 장소와 결합해 제시된다. 신천(소설 속의 은강천)을 따라 펼쳐진 뒷골목은 사고 이전과 이후 그의 눈에 다른 풍경을 드러내 보인다. 쪽지에 적은 영어 단어를 암기하며 걸었던 그 길에서 형주는 '쓰레기통에 쪽지 뭉치를 집어던진 것을 기점으로 삶의 질감이 몽땅 변했다'(47쪽)고 선언한다. 퇴원 후 성(性)에 대한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해 기웃거린 시장통의 동시상영 소극장과,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야학교사의 유골을 뿌리러 간 감포바다에서 함께 간 여학생들과 수영을 하며 슬쩍 만진 '여자의 몸'은 죽음의 나락과 삶을 향한 리비도가 생의 앞뒷면일 뿐이라고 속삭인다. 신천을 가로지르는 수성교에서는 미술을 향한 열정에 눈뜬다. 국전(國展)에서 입상한 미술교사의 수상작을 친구들과 함께 교사의 집으로 나르던 어느 겨울날, 수성교 앞에서 잠시 쉬던 소년은 도시의 음울한 겨울 표정에서 그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추상화의 색과 질감을 발견하고, 그 속에 화가인 선생님이 담고자 했던 시대의 우울을 읽는다.

한 세대 전 학생들을 통해 인생의 보편적 초상화를 그리려 한 작가의 의도는 현재 시제로 진술된 소제목들에서도 드러난다. '폭력은 아이들에게 인간의 고독을 알게 한다'편에서는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한 아이가 부모에게 이를 알렸다가 복도에서 가해 학생들에게 발가벗겨지는 보복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그 나이 때 아이들의 무모함이 드러내 보이는 삶의 민얼굴이 있다"며 "어른이 되어서도 다양한 물리·사회적 폭력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홀로 고난과 마주 선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