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린다, 실재와 환영의 공존을

사진인지 그림인지 헷갈릴 정도로 치밀하게 그린 두 얼굴 사이에 누군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초상화가 끼여 있다. 오른쪽은 작가의 자화상, 왼쪽 주인공은 작가의 둘째 아들이다. 한쪽 벽에 나란히 걸린 세 초상화 연작의 제목은 '세대(Generation)'. 가운데 흐릿한 얼굴은 얼핏 작가의 형상 같기도 하고, 둘을 교묘하게 합친 것 같기도 하다.

"저와 아들 사이에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넣은 겁니다. 제 입장에선 소멸되고 있지만, 아들 입장에선 생성되는 과정이지요. 세대에 따라 변하는 것 같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극(極)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고영훈(62)이 8년 만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있음에의 경의'전(展)에 도자기, 책과 꽃 등 신작 40여점을 내놨다. 오래 천착해온 주제를 다루지만 화풍은 훨씬 여유롭고 넉넉해졌다. 1970년대부터 돌, 콜라병, 달항아리 같은 사물을 치열하게 묘사해온 그는 "이제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어릴 땐 정말 잘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사물이 캔버스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닮게 그리는 데 집착했지요.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식으로. 지금까지는 실재(實在)하는 걸 친절하게 보여주는 데 매달렸지만, 이제 더 이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실재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던 환영(幻影)을 그 자체의 현실로 받아들인 겁니다."

하얀 보름달 같은 백자를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렸던 그의 도자기 그림은 이제 윤곽이 흐릿해졌다. 전시장에는 또렷한 항아리 그림과 함께 점차 뿌옇게 흐려져 가며 화폭 속으로 소멸해가는 항아리 그림이 나란히 배치됐다. 환영이 실재가 되고, 실재가 환영이 되는 지점을 구현하고자 한 것. 미술평론가 김영호 중앙대 교수는 "다양한 초점에 의해 흐려진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배치해 항아리 그림에 시간성을 드러내고자 했다"며 "고영훈의 항아리 그림은 이제 3차원의 공간을 넘어 시간을 더한 4차원의 세계로 진입했다"고 했다.

사실 변한 건 세월 탓이다. 40년간 눈을 지독히 혹사해온 까닭에 시력이 나빠졌다. "10년 전인가, 작업하다 안경을 벗었는데 사물이 흐릿하더라고. 꽃을 그리고 있었는데 안경을 찾아서 끼고 다시 보니, 아까 그 꽃이 아닌 거야. 충격이 왔지요. 처음부터 뿌옇게 봐야 할 형상을 내가 너무 또렷하게 봐왔던 건 아닌가." 그는 "지금껏 스스로 카테고리에 갇혀 못 했던 걸 해보자, 구상이라는 울타리를 조금 확장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전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그와 아들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다. 극사실적으로 인물을 그린 건 처음이라는 작가는 "사람은 자신 없어서 사물만 그렸는데, 어쩌면 얼굴을 그리려고 지금까지 달려온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 전시 주제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6월 4일까지.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