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돈은 많냐?” 아버지의 첫 질문이었다. 딸이 흘긴 눈으로 대꾸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 그 남자도 그걸 물어봤거든요.” 어디선가 읽은 부녀간 대화 한 토막이다.
최근 한 조사를 보면 여자가 배우자 조건 중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사항은 단연 경제력이라고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결혼을 위한 맞선자리에서 연봉, 수입, 차 같은 경제적인 질문만 하는 여자를 가장 ‘밥맛’ 없어 한다지만, 남자들 역시 여자의 경제력을 다다익선이라 여기는 요즘이 아닌가.
그렇게 서로 재고 결혼해서 평생 돈을 벌고 쓰며 모으려고도 애쓴다. 자식을 거두고 노후를 생각하면 아껴 쓰더라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늙어가며 아무리 ‘다 쓰고 죽자’는 소위 ‘쓰죽회’를 기치로 삼는다 해도 마음먹은 만큼 실천하며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큰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거머쥐었다면 모를까, 근검절약하며 살아온 삶의 가락이 금세 바뀌지는 않는 까닭이다. 다 쓰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세금을 줄여서 자식들에게 증여나 상속을 할까 고민하는 이들 또한 많은 마당이다.
간단한 방법
얼마 전 지역 시립도서관에서 열린 ‘행복한 제2의 인생’ 강좌에서만 봐도 그랬다. 국민연금공단의 노후설계 전문 강사들이 노후 재무와 생활 설계를 교육하는 자리였다. 매주 한 가지씩 8주에 걸쳐 진행된 강좌 중에서도 ‘똑똑한 상속 이야기’ 시간에 노년층을 위시한 참석자들이 가장 많았다.
슬기로운 상속사례와 유언의 필요성을 강조한 강의는 유언상속이 최우선시된다는 사실과 유언장 작성법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러나 그 외 상속과 증여의 문제, 특히 더 유리한 세율을 따져보는 데서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복잡하시죠? 간단한 방법이 있죠. 다 쓰시고, 딱 5백만 원만 남기고 가시는 겁니다.”
5백만 원으로는 턱없다고, 아니 5백만 원이나 드느냐고 할 경우도 있을 테지만, 강사의 말인즉슨 장례비만 남기고 세상을 뜨면 된다는 의미렸다. 강의가 끝나고 일어서니 앞에 들은 건 다 어디 가고 내 머릿속에는 5백만 원만 남은 것 같았다.
다른 참석자들도 비슷한지 강의실을 나가며 주고받는 대화에서 5백만 원이 왕왕 들려왔다. “5백만 원이면 한 달 생활비에 조금 넘는 정돈데 그것만 남겨놓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단적인 숫자가 5백이란 거겠지.” “그런데 언제까지 살 줄 알아야 5백만 원만 남겨놓든가 하지.”
하기야 7년 전 타계한 프랑스의 장 깔망 할머니처럼 122세까지 살지 말란 법이 없으니 말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1백세 이상 노인은 지난해 9월 현재 1만 3,513명으로 이 가운데 거주불명등록자를 빼고 주소가 있는 3,485명 정도가 실제 장수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앞으로 점점 크게 늘어날 숫자인 만큼 장례비만 남기고 다 써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복잡해도 상속과 증여에 대해 알아보겠노라고 늦저녁 시간에 강의실을 메운 게 아니겠는가.
돈 쓸데가 없어
집으로 가는 길에 방향이 같은 한 할머니와 잠시 동행하게 됐다. 아까 맨 앞자리에서 “할아버지가 치매인데 그 유언장도 효력이 있는가요?” 질문했던 분이어서 “치매가 심하세요?”부터 여쭈었다. “아직은 웬만해서 여든을 훌쩍 넘긴 내가 먼저 갈지도 모르지. 그런데 딸네에게 홀랑 넘어가서 오피스텔 3채며 부동산을 다 넘겨줄 모양이야.” 줄줄이 가족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들도 마다하는 목욕까지 도맡아 해드릴 만큼 사위가 할아버지에게 잘하는데, 최고 대학을 나온 수재지만 없는 집 출신이라 그 정성이 의심스럽다”는 할머니다. “딸이 먼저 가면 자식도 없는 판에 누구 좋은 일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부동산을 죄다 전세로 돌려서 할아버지가 상속하더라도 껍데기만 주게 만들까 한다”는 게 할머니의 계획이었다. “그러면 강사 말마따나 전세금은 5백만 원만 남기고 다 쓰시면 되겠다”고 했더니 “부동산을 하나 구입할 것”이라셨다.
지금 연세에 무얼 더 사놓으시겠다는 건가 싶었는데, 돈이 있어봤자 쓸데가 없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비싼 해외여행에도, 옷에도 많이 썼지만, 이제는 여행 갔다 오면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못 가고, 옷은 어디 입고 나설 데가 있어야 사 입지, 그저 먹거리에나 돈이 들어갈 뿐”이란다.
할머니와 헤어지고 난 후 스스로 물어봤다. ‘내가 나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걸까?’ 여든을 넘으면 현금도 그렇거니와 부동산은 더욱 새로 갖고자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돈이 많다면 여든 넘어도 쓸 데 또한 많을 것 같았는데….
할머니는 나의 이런 생각을 여지없이 깨트려 준 셈이다. 가진 건 많고 더는 쓸데는 없어도 오직 내 자식, 내 손자에게만 주겠다며 백발의 머리를 짜내는 게 왠지 답답하고도 씁쓸하게 느껴졌다. 서양의 부자들처럼 남에게는 선뜻 못 줄지언정, 둘러보면 형제자매며 일가친척에게라도 베풀 데야 없을까.
어떻게 쓰느냐가 기준
하버드대 행동과학자들이 얼마 전 136개국을 대상으로 경제학과 심리학을 결합한 실험연구를 통해 돈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바로 개인이건 국가건, 돈이 많건 적건 간에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그 기준이란 결론이었다.
같은 액수라도 자녀의 대학등록금을 낼 때와 소년가장을 지원해줄 때의 행복도가 같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요 한 달 사이 다른 사람 또는 단체에 기부한 적이 있는 사람들의 현재 행복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타난 조사 결과도 곁들여졌었다.
서양인들과는 가족개념이 달라서일까. 우리는 내 재산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점에서 좀체 직계비속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돈 많은 할머니만 그런 게 아니다. 돈 적은 나 또한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 테두리를 넘어 베푸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연초 법륜스님은 행복하게 나이 드는 방법의 하나로 모으기보다는 베풀라면서 어디 가든 큰돈이 아니라 다만 천 원짜리 하나라도 나눠주고 오는 연습을 강조했다. 그러다 보면 좀 더 큰돈도 가능할 것이고, 그렇게 써도 5백만 원보다는 더 남기고 가게 되지 않을까. 설혹 통장 속엔 없다 할지라도 받은 이들의 마음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