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 ‘금강산도’, ‘인왕제색도’ 등 남성적인 그림을 선보인 그였지만 말년에는 ‘초충도’와 같은 섬세한 작업에 몰두했다. 나이가 들면 아주 사소하거나 시시할 수도 있는 사물에 주목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국내 유명 원로 작가 한 분이 목가구, 도자기 같은 고미술을 수집해오다가 최근에는 자수를 모은다고 한다. 노대가와 자수.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결합, 아주 매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레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그 아름다움에 새롭게눈이 트인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레이스 달린 옷이나 수가 놓인 장식물을 혐오하기까지 했던 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선, ‘독서여가도’, 간송미술관 소장.
사실, ‘섬세한 취향’은 귀족적인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족과 귀족은 옷과 실내장식, 장식물, 건축 등의 분야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섬세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물건을 만들어냈다. 이런 이유로 선조의 유산을 많이 접하고 느끼며 살아왔던 왕족과 귀족은 섬세함에 대한 극단적인 취향을 키워왔다. 로코코 양식이 유행할 때는 사치가 극에 달했고, 그 사치스러움은 프랑스 혁명을 끝으로 좀 더 고졸하고 단아한 분위기로 바뀐다.
디테일(detail)이란 무엇인가? 원래 디테일은 작고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부 사항을 말한다. 여기서 ‘작고 덜 중요하다’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것은 보통사람들은 관심과 시선을 두지 않는 영역으로,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벗어난 귀족과 예술가들만이 이런 분야에 골몰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예술가들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면 왜 젊은 시절에는 관심 조차 두지 않던 사소하거나 시시할 수 있는 사물에 주목하게 되는 것일까? 나이와 디테일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말년의 겸재가 사랑한 초충도
남성 예술가로 한정해볼 때, 나이 들면서 여성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피카소가 모든 남성 예술가는 ‘페미닌(feminine)’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분명 예술가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서 느끼고 사유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뒤샹이 모피코트를 두르고 찍은 사진을 보면 더욱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확실히 예술가는 성(性)이 없다!
정선, ‘수박 파먹는 쥐’, 간송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1676~1759)은 여든의 나이에 초충도, 즉 꽃과 풀과 곤충을 그렸다. ‘금강산도’와 ‘인왕제색도’ 같은 남성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신사임당만큼 섬세하고 더 유머러스한 초충도를 그렸던 것이다. 겸재의 대표작인 ‘독서여가도’(1740~1741)는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영조의 부름으로 양천 현감으로 지내던 시기, 만년의 자화상에 속하는 이 그림은 그가 왜 그런 작고 사소한 사물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방 안의 서가에 쌓인 책, 서가 안쪽에 그려진 관폭도, 그림부채, 방 뒤쪽의 푸른 잣나무 등은 모두 선비 화가로서의 자의식과 자부심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이는 책 읽기를 일삼고, 서화에 뛰어나며, 자연과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특히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툇마루에 앉아 망중한에 빠져 있는 겸재의 모습은 사물을 완상하는 그의 취미를 한껏 보여준다. 겸재는 자기 앞에 놓인 꽃과 화분의 디테일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깊이 집중해서 보았던 꽃과 나비와 벌을 독립적으로 그리게 된 것도 아마 이런 완상의 기쁨을 누린 연후에 나온 것이리라.
그래서 말년의 겸재는 시력이 약화되어 안경을 쓰면서까지 아기자기한 초충도 그리기에 몰입했던 것 같다. 그의 그림 속에는 패랭이, 맨드라미, 여뀌, 국화 같은 식물과 벌, 나비, 파리 등 작은 벌레들이 짝을 이루어 결합되어 있다. 예컨대 쇠똥구리와 도라지꽃, 두꺼비와 가지, 오이밭의 개구리, 맨드라미와 병아리, 꽈리와 수탉, 수박을 파먹는 쥐의 결합은 얼마나 위트와 유머가 있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고슴도치가 오이를 훔쳐가는 장면은 압권이다. 고슴도치가 자기 몸을 뒤집어 오이를 콱 등에 꽂고 가는 모습은 얼마나 귀엽고 앙증맞은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겸재가 세세한 것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그것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선, ‘초충도’, 호림박물관 소장.
이처럼 겸재의 초충도는 말년의 화가가 얼마나 작고 사소하고 섬세한 취향에 몰입하고 즐겼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두고 누가 겸재를 소심하고 쩨쩨하다 할 것인가? 누구인들 섬세함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는 노대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고 사소한 사물에 대한 천착
거미 조각으로 유명한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는 86세인 1997년부터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만든 조각 ‘거미’가 제작되어 세계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지 3~4년이 흐른 뒤였다. 사실 부르주아는 40세가 넘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고, 70세가 다 되어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살다 간 찬란한 명성의 예술가였다. 90세를 앞둔 그녀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만 하겠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웬걸! 남성성기와 거세도구 혹은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작업을 하던 그녀가 손바느질만으로 아주 작은 인형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더 이상 값나가는 무겁고 딱딱한 재료가 아닌, 입던 잠옷이나 사용하던 이불시트 같은 폐품이나 잡동사니를 재료로 사용한 것. 이를 통해 그녀는 유년시절 태피스트리를 복원하는 가게를 운영하던 부모를 도운 기억을 되살려내기 시작했다. 그 인형들은 비로소 그녀의 유년시절에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행위로서 마감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느질로 세상의 모든 상처를 꿰매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부르주아의 인형작품은 이전 작품보다 훨씬 작아졌지만, 그 아우라는 큰 거미 조각을 압도할 정도다. 그녀는 나이 아흔이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삶과 화해를 시작할 수 있었고, 아주 작고 사소한 사물에 대한 천착은 유년의 기억을 되살리는 도구였던 것이다.
정선, ‘초충도’.
부르주아는 세심한 바느질로 인형 연작에 몰두하더니, 그 다음에는 꽃 연작을 시작한다. 말년의 꽃! 이것은 겸재의 초충도와 같으면서 다른 것이다. 둘 다 내면의 꽃을 그렸지만, 겸재가 여성적이고 관조적인 꽃이라면 부르주아는 양성적이고 역동적인 꽃이다. 부르주아가 죽기 3~4년 전에 그린 꽃 작품은 그녀가 삶에 보내는 환생에 관한 편지이자 생명에 관한 드라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실제 꽃에 대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반응이다. 말년의 부르주아는 꽃을 선물하면 화를 냈다.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꽃을 선물했지만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부르주아는 현관 앞에 양철통을 놓고 꽃을 받으면 집으로 들이지 않고 그 안에 꽂아두었다. 카드나 꽃병은 때때로 보관했지만 꽃은 늘 집 밖에 내놓았던 것이다.
꽃에 대한 부르주아의 이런 태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 꽃을 좋아하게 된다는 통념과는 상반된 태도다. 부르주아에게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아마도 그녀는 꽃이 주는 의미, 즉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서양 정물화의 테마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드는 꽃을 통해 자신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게 끔찍이도 싫었을 것이다. 혹은 꽃을 보면, 그것을 사랑했던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부르주아는 100세까지 장수했다. 그녀는 나이 들면서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거대담론에 대한 관심보다는 더욱더 자기다운 일에 집중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형과 꽃은 만년에 그녀가 이룩한 가장 미시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생명력을 담보한 예술이 되었다. 그녀는 꽃을 통해 환생했고, 그것으로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누구도 줄 수 없었던 ‘노년의 황홀’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본능으로의 회귀
나이 드는 것을 신의 섭리를 깨달아가는 적나라한 과정으로 본다면, 노대가들은 신의 섭리가 아주 미세한 것에도 미치며 따라서 모든 존재는 평등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 사소한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아주 작은 사물과 디테일을 즐기고 탐미하고 기뻐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살아오면서 산전수전을 겪고 나면 비판이든 간섭이든 타인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는,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는 관록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잔말 마라! 나는 이제 누가 뭐라 해도 내가 하고픈 걸 한다!” 마치 나이 들면 소심해지는 한편, 더욱더 용감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겸재 정선의 초충도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인형과 꽃은 예술가의 말년이 얼마나 축복이고 풍요로운지를 보여준다. 눈에 보이지 않던 사물에 시선을 던지자 그 작고 시시한 사물이 그들에게 엄청난 은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사소한 사물이 주는 은총! 앞으로 다가올 육체적 늙음이여, 우리를 축복할지어다!
유경희는 대학에서 국문학, 대학원에서는 미학을 전공한 후 시각예술과 정신분석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 과정을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유명 사립미술관아카데미, CEO를 위한 특강 등 대중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가의 탄생>, <10개의 테마로 만나는 아트살롱> 등이 있다. 현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를 운영, 예술과 인문학을 통한 코칭과 멘토링 등 맞춤교육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