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휩싸인 숭례문 보며… 궁궐 그리겠다 결심

서양화가 김기철(52)은 궁궐을 그린다. 서울의 5대 궁궐과 4대 문을 실물 그대로 그린다. 2008년 숭례문이 화마(火魔)에 휩싸여 무너지는 모습을 본 뒤부터다.

"아, 참담했지요. 꿈속에서도 계속 불타는 숭례문이 보였어요. 그제야 우리 옛 건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말 없이 지켜본 우리 궁궐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 깨달았지요. 더 늦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오늘(28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가나인사아트센터에 선보이는 김기철의 궁궐 그림은 이채롭다. 보 하나, 기와 한 장까지 실물과 똑같이 그려낸 세밀화인데, 배경색이 빨강·파랑·노랑 등 강렬한 원색이다. "추상과 구상, 비구상을 모두 활용했습니다. 오래된 궁궐이라고 해서 칙칙하게 표현하긴 싫었어요. 살아 있는 듯 현대적인 색감으로 연출하되 담벼락에는 퇴색한 세월의 깊이를 담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처음엔 '왜 궁궐을 그리는 화가가 없지?' 하면서 의아했지만 작업해보니 이해가 됐단다. "단청 하나하나를 정확히 묘사하려면 확대경이 있어야 해요. 붓도 가장 작은 0호가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0호 중에서도 털이 빠진 붓으로 그려야 했습니다(웃음)."

하루 12시간씩 20일을 꼬박 작업해야 50호(117×90㎝) 크기 그림을 완성한다고 했다.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져 안과 치료를 받는 중이다. 그래도 벽돌 숫자까지 실물과 맞추려고 여전히 눈을 혹사시킨다.

초기 작품인 경복궁 근정전은 두 달 반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다. 배경이 분홍·빨강·노랑으로 구분된 독특한 작품이다. "궁의 권위와 기상,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고 싶었죠. 누구보다 아이들이 궁궐 그림 보러 왔으면 좋겠어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엔 누가 살았는지 알아도 경복궁·창덕궁엔 어느 임금님이 살았는지 모르는 게 우리 현실이잖아요?"

5년 동안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궁궐과 4대 문을 답사하면서 속도 많이 썩었다. "대형 서점을 다 뒤져도 우리 궁궐을 입체적으로 소개한 책이 없더라고요. 문화재청에도 사진 자료는 거의 없었죠. 사진 촬영에 제약은 또 어찌나 많은지. 창덕궁 만월문(滿月門)을 그려야 하는데 촬영이 금지돼 관리소에서 대신 찍어 보내준 사진들을 보고 그려야 했습니다."

가장 마음이 가는 그림은 역시 숭례문이다. "풍수상 관악산의 불기운을 잡는다고 해서 현판을 세로로 건 문이죠. 4대 문 중 가장 수수하고요. 단청 자체에 밝은 색이 거의 없이 우중충해서 일부러 밝게 색을 입혔어요. 부실 공사로 판명 나 또 한 번 가슴이 아팠습니다만."

충청도 산골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서울예고, 홍익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서울 아이들은 '밥은 먹었느냐' '밤새 편안했냐'는 내 아침 인사를 이해 못하더라고요(웃음)." 그에게 서양화를 가르친 스승들은 "웬 궁궐이냐"며 황당해하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다.

"동양화·서양화의 구분이 의미가 없지요. 그냥 현대화입니다. 이제 겨우 1% 그렸어요. 전주성·수원성 등 전국에 있는 우리 궁궐을 화폭에 담아내려면 아직 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