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30년 넘게 외국 건축에 맷집 길러왔소"

"또 일본이야." 지난 3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Pritzker)상 수상자로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57)가 선정됐을 때 국내 건축가들 사이에선 한숨이 새나왔다. 지난해 이토 도요(73)의 수상에 이어 이례적으로 일본 건축가가 연거푸 상을 탄 것이었다. 일본은 프리츠커상 수상자 최다(6회) 배출국이 됐다. 이쯤 되자 의문이 생겼다. "왜 일본일까."

지난 23일 자서전 '나, 건축가 구마 겐고'(안그라픽스) 한국 출간 기념 강연을 위해 서울에 온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隈研吾·60)를 만났을 때 이 질문부터 던졌다. 세계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일본 대표 건축가 중 하나이자, 일본 건축 엘리트의 산실인 도쿄대 건축학과 교수인 그라면 뭔가 답을 줄 것 같았다.

"일본 건축이 30년 넘게 외국 건축에 대해 맷집을 길러온 결과다." 맷집이라니. "1980년대 버블 경제 때 일본에선 외국 건축가를 불러 건물 짓는 게 유행이었다. 일본의 도시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건축물을 보며 건축계에서 비판이 일었다. 일본 땅에서 토종 건축가와 외국 건축가가 경쟁하는 구도가 생겨났다. 자연히 일본 건축의 수준이 높아졌다."

"셀 수 없이 한국에 많이 왔다"는 이 지한파 건축가는 "지금 한국이 30년 전 일본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고 했다. 그 생각이 든 건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때문이었다. "DDP에 가 봤는데 창이 없고 폐쇄적이더라. 좀 아쉬웠다. 그건 건축가(자하 하디드)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런 디자인을 결정한 행정 탓이다.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 일본처럼 어쩌면 외국 건축이 유입되고 있는 지금이 한국 건축가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기를 기회"라고 조언했다.

구마 겐고는 현재 한국에서 프로젝트 5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 건축은 부유한 이들의 전유물 같아 보였다. "한국에선 부자들이 별장이나 집을 짓는다. 반면 일본은 단독주택을 선호하기 때문에 서민도 건축가에게 집 설계를 맡기는 게 보편적이다. 자연히 건축가가 작은 집을 통해 '짓는다'는 경험을 할 기회가 많다." 일본 건축의 힘은 '축적된 건축 문화'에서 비롯됐다는 얘기였다.

역으로 한국 건축이 일본에 시사하는 바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구마 겐고는 책에서 한국 건설업체의 세계화를 언급하며 '일본은 한가로운 시골 마을에서 고타츠(난방용 화로)에 발 담그고 있다'고 일본의 무사안일을 콕콕 찔렀다. "강단에서 보면 유학 가려는 학생이 없다. 밖에서 봐야 자기 문화를 더 잘 볼 수 있다"며 한국 학생들의 해외 도전 욕구를 높이 샀다.

구마 겐고는 젊은 시절 유리에 오른손을 다쳤다. 이후 왼손잡이가 됐다. 이 시련 덕에 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피해 지역 장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EJP(East Japan Project)'를 벌이며 치유에 동참했다. 재난을 얘기하던 그가 세월호 사건을 언급했다. "사회적으로 큰일을 당하면 당장 뭔가를 극복하려고 들지만 안 된다. 다시 그 사회를 차분히 돌아보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는 것, 그게 재난이 주는 교훈 아닐까."


☞구마 겐고

도쿄대 건축학과 졸업. 도쿄 산토리 미술관,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스코틀랜드 분관 등 설계. 안도 다다오 등 일본의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활동했던 이전 세대의 건축을 ‘강한 건축’이라 규정짓고, 약해진 일본을 배경으로 만든 본인의 건축은 ‘약한 건축’으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