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요즘 사는 맛

‘일을 남보다 배로 하고 배로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이게 내 사주란다. 울 엄마도 내가 태어난 시(時)가 저녁 여덟 시인지 아홉 시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저 막연히 칠월에 저녁밥 먹고 좀 있다 낳았다고 하니 알쏭달쏭하다. 그러니 정확하기야 하겠느냐마는 내게 베푸는 사람은 없는데 내가 벌어먹고 또 베풀고 살아야 하는 팔자란다. 맞는 얘기다. 평생 누가 내게 한 푼 주는 이는 없는데 나갈 때는 많으니 점쟁이들이 용하긴 용하다.

아침 새벽부터 일어나 저녁 해 질 때까지 분주하게 돌아다녀 번 돈으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친정까지 거들고 산다. 그나마 고마운 것은 시부모님들이 일찍 돌아가신 덕분에 한 짐 덜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집살이할 팔자는 아니라 했다.

오늘 아침엔 휴일인데도 숨이 너무 찼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 하루쯤 둘레길 걷는 것을 빼먹기로 했다. 나도 숨 좀 편히 쉬어보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둘레길 산책을 끝내고 아침 차려 먹고 출근하는 게 너무 힘에 겨웠기 때문이다. 거기다 저녁은 저녁대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느라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기 일쑤였으니 숨이 찰 수밖에 없었다.

잠이야 이미 새벽에 깼다. 마음과는 달리 매일 일어나는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 진 것이다. 그냥 침대에 누워 엎치락뒤치락했다.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어느새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키가 작아 옷기장을 줄이려고 수선집에 맡기려던 것을 잡고 재봉틀을 밟고 있었으니 바쁘게 사는 것도 팔자다 싶다. 그러니 명퇴를 하려고 번번이 신청해도 떨어지고 말지 싶다. 그래도 고맙다. 누구한테 손 벌리지 않아도 되는 삶이니 이보다 더 고마울 데가 없다. 돈이야 버는 대로 다 나가는 게 팔자라는데 욕심을 버리고 재미나 찾자 싶었다. 그 게 옥상 텃밭을 만들어 놓은 이유다.

요즘 하는 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이 옥상 텃밭에 올라가는 일이다. 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참기름을 사다가 어디 두었는지 생각나지 않아 집 안 이곳 저곳을 다 헤매고 다녀도 옥상 텃밭에 오이꽃이 언제 피었는지, 화분에 심어 놓은 감나무 옆에 핀 코스모스꽃이 지금 몇 송이 피었는지는 알고 있다. 하긴 이 코스모스꽃도 웃긴다. 지금 철이 어느 땐데 신나라 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옆에 철모르기는 들국화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꽃봉오리가 맺히더니 노란 들국화까지 피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눈에 선하다.

벌떡 일어나 옥상 텃밭에 올라갔다. 텃밭에 심어 놓은 토마토 가지에 노란 꽃들이 수도 없이 피었다. 토마토 가지가 징그럽도록 실하다. 세탁한 이불을 널러 오신 오 층 할머니가 농사를 어쩜 그리 잘 짓느냐고 칭찬하신다. 얼른 딸기를 심어 놓은 상자 텃밭에서 딸기 몇 개를 따 잡숴보시라고 드리곤 나도 두어 개 따서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딸기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수확해 김치를 담갔었다. 다시 그 상자 텃밭에 씨앗을 뿌리고 모기장 망을 덮어씌웠다. 안 그러면 배추흰나비가 어느 틈에 날아와 알을 낳고 만다. 그러면 수확이고 뭐고 없이 순까지 다 먹어치우고 만다. 벌레와의 전쟁이다.

알 정도야 그래도 괜찮은데 아기 손가락 만한 애벌레가 이곳 저곳에서 기어 다니면 그것만큼 징그러운 게 없다. 작년에 그래서 열무 한 통을 다 둘러 엎은 적도 있다. 다행히 올해는 모기장 망을 씌워 놓은 탓에 무공해 열무김치를 담가 맛있게 먹고 있다. 어른 손바닥보다 크게 자란 상추잎을 따기로 했다. 오늘 오후에 연극 같이 보기로 한 친구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상추잎을 따 아파트에 돌리고, 다른 지인들에게도 돌리고, 상추 몇 포기 심어서 인심을 팍팍 썼다. 확실히 상추 맛이 달랐다. 마트나 시장에서 파는 상추는 잎이 얇았다. 싱거웠다. 그런데 텃밭의 상추는 두껍고 크고 고소하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한 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서둘러 친구 만나는 장소로 갔다. 친구에게 상추 봉지를 내밀었다. 친구는 내게 들기름을 짰다고 들기름 한 병을 내민다. 요즘 트렌드인 덜 볶았다고 덜 고소할 거라 말한다. 덜 고소하긴…. 나의 고소한 상추와 너의 고소한 들기름이 만났으니 이보다 더 고소할 수가 없다. 서로가 베푸는 맘, 별것은 아니지만 정이 묻어나는 삶. 그래서 요즘은 사는 게 깨소금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