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名畵인가] 사무치는 그리움… '연기 텃밭'의 거름되다

배우에게 감성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흔히들 감성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감성은 습득(習得)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채워두고, 연습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담아둔 정신의 내면을 연기할 때마다 뽑아 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그림은 감정이라는 연기의 텃밭을 비옥하게 해주는 거름과도 같다. 짬나는 대로 아내와 갤러리에 들러 갖가지 그림의 질감, 색감을 눈으로 입력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치환해 가슴에 넣는다.

나에게 '그리움'이란 감정의 스승은 김환기(1913~1974) 선생이다. 거대한 화폭 가득히 무수히 많은 점이 퍼져 있는 선생의 전면점화(全面點畵)를 보고 있노라면 아련한 그리움과 처연한 기다림이 사무쳐 온다. 특히 선생이 작고하기 1년 전인 1972년에 그리셨다는 '십만개의 점 04-VI-73#316'에선 이 그리움이 클라이맥스에 이른 듯하다. 해운대에서 열리는 '명화를 만나다―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에 이 그림이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주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내와 모자 푹 눌러쓰고 가서 본 서울전에선 안 걸렸던 그림이었다.

그것은 작은 우주이며, 기다림이었다. 고요히 퍼진 십만개의 점 위에 내 마음이 살포시 얹혀졌다. 푸른 점 사이를 가로지르는 흰 선들은 날렵하되 결코 차갑지 않다. 초가집의 그것 같기도 하고, 밭고랑의 그것 같기도 한 부드럽고 서정적인 우리네 고향의 실루엣이다. 선생은 하나의 점에 하나의 꿈과 하나의 그리움을 채우셨으리라.

내가 김환기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1980년 즈음이었다. 뉴욕에 여행 가서 한 갤러리에 들렀는데 다음 날 한국 작가 전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이가 바로 김환기 선생이었다. 작고한 화가라는데도 현대 예술의 중심, 뉴욕에서 우리의 화가 이름을 듣게 되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귀국 후 나는 선생의 그림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10호 크기의 작은 작품을 사서 집에 걸어뒀다가 자선 경매용으로 낸 적도 있다.

선생을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선생의 예술에 빚을 졌다. 선생이 남긴 그림은 30여년간 내게 상상의 밭이자 창작의 마당이 되어줬다. 이 '할애비'의 감성을 길러준 텃밭을 일곱 살 손녀에게도 보여줄 참이다.


작품 보려면… ▲7월 6일까지, 휴관일 없음 ▲부산시립미술관 ▲관람료 성인 6000원, 초·중·고생 3000원, www.koreanpainting.kr (051)747-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