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심장에서… 그는 詩가 되었네

시인(詩人)은 해발 4000m 티베트 라싸로 청중을 데려갔다. 거기 늙은 거지가 있다. 다 쭈그러져 누런 이빨 두어 개만 남은 거지는 '이이이이' 웃다가 한마디 한다.

"한 푼 줍쇼/ 따위가 아니라/ 어럽쇼/ 어럽쇼/ 그런 시시껄렁한 구걸이 아니라/ 당신께서 가장 높으십니다/ …생각건대 나 또한/ 거지 중의 상거지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의 한 구절과 한 구절 사이의/ 빈 데를/ 그제도/ 그 이튿날에도 얻어보려고/ 안 나오는 젖 빨아대며/ 이 꼭지 저 꼭지 배고픈 아기주둥이로 파고들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고은 시인이 시(詩) '라싸에서'를 소리 내 읽었다. "당신께서 가장 높으십니다"라는 구걸의 경지가 설산(雪山)의 빛처럼 눈부셨다. 시인이 무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박수가 메아리쳤다.

지난 5일 밤(한국 시각 6일) 독일 베를린 티어가르텐 숲에 자리 잡은 예술아카데미에서 제15회 베를린 시축제가 열렸다. 낭독 무대 '시의 밤(Nacht der Poesie)'이 개막식을 장식했다. 고은을 비롯한 8개국 시인 9명은 통역·영상·음악 없이 오로지 소리와 몸통, 정서로 시편들을 일으켜 세워 500석 극장을 진동시켰다.

팔순을 바라보는 시인 파울루스 뵈머(독일)는 무대 위 의자에 앉아 거친 숨소리부터 들려줬다. 앨리스 노틀리(미국)는 무대 아래에서와 달리 단단한 에너지를 뿜어냈고, 필리파 야데 빌리어스(남아프리카공화국)는 시가 어떻게 노래와 춤이 되는지 증명했다.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 레스 머레이(호주)의 낭독은 둥글둥글한 외모와 내면이 소통했다.

이날 주인공은 천진한 악동, 고은이었다. 차례가 되자 객석에서 '고은이다'라는 속삭임이 번졌고, 죽비로 후려치듯 "해가 진다!"를 내지르며 낭독이 시작됐다. 청중은 몰입했다. 사회자는 "고은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 시가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제야 뜻을 알겠다"고 감탄했다. 베를린 시축제 조직위원장 토마스 볼파르트는 "해마다 초청하고 싶었던 거장(big name)"이라고 했다.

시는 축구나 록 콘서트처럼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다. 그런데 청중은 3시간 넘게 낭독에 집중했다. 입장할 때 나눠준 독서등이 어두운 고요 속에 별빛처럼 빛났다. 시가 문자 발명 전부터 소리로 존재했고 예술의 뿌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연극배우 프란체스카 아놀트(50)는 "시 낭독이 밀도 높은 소리만으로도 이렇게 강력할 줄 몰랐다"며 "순수한 불꽃이 올라오는 느낌"이라고 했다. 시 축제는 낭독과 강연, 체험 프로그램 등으로 13일까지 이어진다.

이튿날 한국문화원 낭독회에 앞서 만난 고은은 "티베트에 설산의 정기를 받으러 갔다가 뼈다귀만 남아 돌아왔는데 늙은 거지 덕에 얻은 시가 '라싸에서'"라며 "조선 후기 시조창(時調唱)처럼 시는 노래이자 사회적인 행위였다. 오늘날 사라진 시 낭독 문화를 되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독일 신문이 '고은의 시가 종교적'이라고 평한 것에 대해선 이렇게 답했다. "내 종교는 백지(白紙)다. 숫자로 얘기하면 '0'이다. 0은 뭐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내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