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로 담아냈다… 제주, 神仙 살던 그곳

"자, 이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지난 3일 오후 제주시 오라2동 명승 제92호 방선문(訪仙門). 아치형 동굴 같은 바위 앞에서 김치년 상명대 환경조경학과 교수가 말했다. 계곡 한가운데 마치 대문을 열어놓은 듯 지붕 덮이고 앞뒤 구멍이 트인 바위가 나타났다. 천장 입구에 '방선문'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었다. 신선이 드나드는 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 선명하게 새겨진 각자(刻字) 보이시죠? 고종 때 최익현 선생이 한라산을 등반할 때 이곳에 들러 새긴 겁니다." 오른쪽 바위 위에 '參判 崔益鉉 李基瑥 來 乙亥'라는 각자가 또렷했다.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다 제주도에 유배온 최익현(1833~1906)이 1875년 유배에서 풀리자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그때 제주 훈장 이기온과 함께 방선문에 들렀다는 기록이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에 전하는데, 바위 글씨는 그 방문 흔적을 현장에 직접 남긴 것. 김 교수는 "영주(瀛州·제주도의 옛 이름) 12경 중 하나인 방선문은 봄이면 진달래꽃과 철쭉꽃이 만발해 상춘객이 많이 찾은 풍류지였다. 특히 제주에 벼슬 살러 온 관리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글씨와 시(詩)가 50여 군데 남아있다"며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역사적 스토리가 풍부하게 담긴 명승 중의 명승"이라고 했다.

◇최첨단 장비로 명승 현지 조사

현재 전국에 명승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107곳. 제주도에는 방선문을 비롯해 산방산, 쇠소깍, 백록담, 사라오름, 영실기암과 오백나한 등 9곳의 명승이 있다. 자연경관이 뛰어날 뿐 아니라 지질이 특이하고 희귀 식물이 많은 학술적 보고(寶庫)이지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제주 명승지를 과학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상명대 산학협력단과 함께 지난 4월 '명승 경관자원 조사 연구 및 DB구축'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김치년 교수를 책임 연구원으로 수목 및 식생·지질·경관·항공사진·역사자원 등 전문가 20여명이 11월 말까지 조사를 펼친다.

지난 3~4일 동행한 연구팀의 2차 현지답사에는 멀티콥터, 광대역 스캐너 등 최첨단 장비가 총동원됐다. 연구원은 내시경 카메라를 바위 표면에 대고 글씨를 스캔하고, 지형과 지질 조사를 위해 광대역 스캐너로 경관 주변을 3D 스캔해 담았다.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곳은 멀티콥터를 날려서 항공사진을 찍고, 360도 파노라마 경관 사진이 필요한 곳은 전문 작가가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하늘을 날면서 카메라에 담았다.

수목·식생 조사를 맡은 심우경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는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산방산(명승 제77호)을 답사해 보니 다른 데서 보기 힘든 지네발난(蘭)이 산방산 암벽에 붙어 자생하고 있고, 산림청 지정 희귀 식물인 가시딸기가 해발 200m 지점에 폭넓게 자생하는 것이 확인됐다"고 했다.

◇'아바타'처럼 다양한 콘텐츠로 활용

문화재청은 1970년 '명주 청학동 소금강'을 시작으로 경관이 뛰어난 장소를 '명승'으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명승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대만 등 4개국에만 있다.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동아시아의 산수는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 휴먼 스케일"이라며 "중국의 풍경명승구로 지정된 장가계가 영화 '아바타' 배경에 그대로 활용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처럼 영상물 등 2차 콘텐츠로 얼마든지 활용 가능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