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우체국앞을 지나며…

 병원에 가려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을 건너 돌아서면 우체국이다. 우체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환하다. 붉은 베고니아 화분이 눈길을 잡아끈 탓이다. 통통한 베고니아잎에 윤기가 잘잘 흐른다. 빨갛게 소담스럽게 핀 꽃들이 지나가는 사람마다 눈길을 잡고 놓지 않는다.

우체국에 언제 들어 가 보았는지 가물가물하다.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에 나오는 가사다. 그래, 그 옛날 나도 기억 저편 어딘가에서 엽서를 쓰던 소녀였다. 우체국에서 누가 볼까 봐 마음 졸이며 써 내려갔던 엽서들이 있다.

집에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떠난 그 남자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밤.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고향 우체국에서 전화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리며 두근대던 가슴, 하고 싶은 말들은 산처럼 쌓였는데, 그 남자와 소근대고 싶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잘 들리지 않는 저 너머 목소리 때문에 점점 커져갔던 내 목소리. 끝내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일상적인 안부로 끝내야 했던 그 시절. 우체국 언덕을 내려오는 언덕길이 왜 그리 허전했던지.

다음 날, 햇살 가득한 우체국 계단에 앉아 20원인가 주고 산 엽서를 썼다. 누가 볼세라 손으로 가려가며 썼다. 어젯밤, 끝내 소근대지 못한 이야기들을 깨알같이 써 내려갔다. 시집에서 혹은 심야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이었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언어로 내 마음을 써 내려갔다. 어떤 이들은 유치했다고 하겠지만, 그 시절엔 사랑에 빠진 이들은 누구나 시인이고 수필가였다.

휴대폰 한 통이면 끝나는 세상. 깊이 생각할 일도 없고, 달빛이나 별빛을 바라보며 그리워할 일도 없다. 새벽이든지 한밤중이든지,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낼 수 있고, 그것도 답답하면 말로 할 이야기도 이모티콘 하나로 해결하고 만다. 그러니 내가 보낸 편지나 엽서를 ‘지금쯤 받았을까?’ 하는 두근거림이나, ‘어떤 답장이 올까?’ 하는 기다림이나 설레임도 사라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사라진 것이 어디 이뿐이랴. 휴대폰이라는 물건을 누구나 갖게 되면서부터 길가에 서 있던 붉은 우체통이나, 누런 묵직한 가방을 메고 골목길을 들어서던 우체부가 사라졌다. 올 데도 없는 엽서를, 편지를, 우체부만 골목길에 보이면 괜스레 두근대던 마음도 사라졌다. 아직 우체국에 가면 우표야 팔겠지만, 그 우푯값이 얼만지 난 지금 알지 못한다.

조용필의 노래처럼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을 올라가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받을 이만 있다면 엽서 한 장을 사서 편지를 쓰고 싶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울 아버지. 그리고 죽어도 잊지 못할 그 남자에게 ‘나 잘 있어. 나이가 드니까 왠지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잘 살아. 아들도 장가를 갔고 손주도 봤는걸. 나 할머니 됐어 후후. 나도 이제 늙는다. 나중에 만나면 나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가끔은 그런 걱정도 해.’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