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천(蓼川), 어릴 적부터 지리부도를 끼고 살았던 내게도 낯선 이름이었다.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로, 춘향골의 풍류와 옛 이야기가 살아 있는 남원을 흐르니 예사 강이 아니다. 누구는 춘향의 강이라 했고, 누구는 견우와 직녀의 슬픈 전설의 강이라고 했다. 남원을 지날 때까지도 강바닥은 세월이 씻긴 바위로 가득하다. 장수에서 출발한 강이 급류를 토해내며 깎아낸 탁마의 흔적이 여뀌꽃 피는 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요천을 주었다.
이름도 낯선 요천(蓼川), 여뀌풀 요(蓼)자를 쓴다. (※여뀌-마디풀과의 한해살이 풀) 높이는 40~80㎝이며 잎은 어긋나고 피침 모양이다. 6월과 9월에 꽃잎의 끝이 붉은 색을 띠는 연녹색 꽃이 핀다지도에서 확인하고 나서야 장수에서 발원하여 남원을 지나 섬진강에 안기는 지류하천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국가하천이다. 그만큼 중요도가 크겠다.
대구의 팔공산과 같은 이름인 장수 팔공산(1151m)에서 발원한 장남저수지가 여정의 출발이다. 이 저수지는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의 뒤통수를 보고 있으니 수분령이란 고개 이름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 크게 보면 금강과 섬진강의 다른 물줄기를 가르마 타고 있는 게 되니 말이다.
금강의 뒤꼭지에서 발원하는 요천
5월이라도 아침 공기가 차다. 두어 겹을 껴입고도 장남저수지를 출발할 때는 찬 기운이 속으로 파고든다. 장수군 번암면 소재지인 노단까지는 19번 국도를 함께 이용할 수밖에 없다. 아직 강둑을 만들만치 강폭이 넓지 않다. 그저 소하천 수준이다. 노단 삼거리에 이르면 장안산(1237m) 군립공원과 백운산(1279m)에서 동화호를 거쳐서 내려오는 큰물줄기인 백운천과 합류하며 강의 아제비 격은 되는 규모를 갖춘다.
노단 삼거리에 이르면 우측에 정자 하나가 벼랑에 붙어 서 있다. 만들 당시야 그 아래로 요천의 벽계수가 흘렀을 터이나 국도를 확장하면서 물러나 앉았다. 취헌 장안택이 만든 정자다. 그가 조선조 철종14년에 태어났으니 150년 밖에 안 된 사람이다. ‘만인적덕(萬人積德)’과 ‘제세구휼(濟世救恤)’에 힘썼으니 그도 경주 최부자만큼이나 이 지역에서의 덕망을 갖춘 부자였나 보다. 동학군과 관군에게 두루 먹을 것을 베풀었다니 결국 민초들이 피해를 그만큼 덜 본 것이겠다.
‘노단리’라는 이름도 노나라에 태어난 공자의 집 터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보통 합수머리가 아니다. 이른 아침이라 그렇겠지만 면 소재지는 깊은 잠에 빠져있다. 사람 사는 곳이니 역시 약방과 정육점 간판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골목을 슬쩍 들여다봐도 너덜거리는 농약사 간판과 꽃다방 앞의 화분만 덩그렇다.
88올림픽고속도로가 슬쩍 지나가는 외진 산골, 장수
동남향으로 흐르던 요천은 이제 서남향으로 완전히 방향을 바꾼다. 멀리 하동까지 내려가는 19번 국도도 강 저편으로 밀쳐내고 노단교를 건넌다. 도로는 넓으나 차들은 가뭄에 콩 나듯 다닌다. 제법 강둑이 만들어졌나 싶어 올라가보면 얼마 가지 않아 길이 끊긴다. 못자리를 앞둔 모판을 주욱 꺼내 놓고 키우는 중이다. 하기야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이용하는 게 토지효용을 높이는 길이기는 하리라.
다리 이름을 확인하는 것은 강둑길 여행에서는 입국심사만큼이나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제법 오래된 다리 하나가 막아선다. 습관적으로 문패를 본다. 뜯겨 나갔다. 지금까지는 그런 걸 보면서도 새로 도로와 교량이 만들어지면서 용도 폐기된 다리라 이름마저 빼앗긴 거로구나 하고 대수롭잖게 여겼었다. 문득 그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전선을 잘라가고, 도로 맨홀 뚜껑을 훔쳐가는 도둑이 동판으로 새겨진 다리명패와 건설제원을 모두 떼어간 것, 그래 맞다. 전국에서 목격한 그 살풍경의 진원이 바로 그나마 돈 되는 멀쩡한 다리의 명패를 빼내 가는 것이었다. 맛있다고 눈알부터 우선 빼먹고 남은 동태 같다는 생각이 들자 들판이 문득 쓸쓸해진다.
지리산 운봉고원을 거쳐 내려오는 88올림픽고속도로와 만나는 남장수IC에선 잠시 국도로 나왔다가 월석교에서 다시 건너 강둑을 타고 내려간다. 이 구간의 고요는 강둑길 여행의 정수라 할만하다. 풍경에 잠겨 가노라면 여울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씻어준다. 들을 것 못들을 것, 세상의 너절한 일상에 지쳐있을 귀를 이 또랑또랑한 물소리가 어루만져준다. 이런 걸 요즘 참 흔한 말로 ‘힐링’이라고 하는가.
공짜 캠핑의 명소가 된 고소정 뜨락
혼자 가던 강둑길에 숲이 나타난다. 알록달록한 텐트의 야영군락지 고소바위공원이다. 그다지 바쁠 것도 없는 가족들이 이제 막 일어나 아침준비를 한다. 이럴 때 텐트를 치고 걷는 일이 끝나면 그다지 효용이 없는 아빠는 아이들의 서툰 자전거 타기를 잡아주거나 배드민턴채를 잡는 것이 고작이다. 그저 공터만 있으면 제대로 시설도 안 갖추고 주차료니 야영비니 하면서 터무니없이 값을 불러대는 오토캠핑장에 비하면 남원의 인심은 넉넉하다. 강가에 이만한 시설이면 관청에서라도 악착같이 돈을 받을 텐데 무료다.
우리 시대에도 부지런한 아버지들은 그래도 텐트라도 장만해서 물가를 찾곤 했지만 지금의 아빠들만큼 제대로 된 캠핑을 몰랐다. 어릴 적부터 와일드 라이프, 아웃도어란 개념이 없었으니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 단원이 아니라면 별보고 잠드는 건 외갓집 평상(들마루)에서 모깃불 연기를 쐬는 게 고작이었다. 후회와 아쉬움만 밀려들어 잠시 그 텐트촌의 평화로운 풍경을 멀찌감치 바라본다.
요천교에 이르자 멀리 24번 국도가 운봉, 인월 이정표를 달고 있다. 멀리 함양, 안의로 넘어가는 긴 고갯길이다. 운봉고원은 400~700m의 고원지대라 양떼 목장이 자리잡고 꺼먹돼지가 산다. 인월은 전라도와 경상도가 함께 모여 장이 선다. 강을 건너 모이는 화계장과 달리 고갯마루 너머 전라 경상 사람들이 모이는 3·8장이다. 거기에는 여전히 서먹한 지역감정 같은 말도 안 되는 묵은 때는 본시 없다. 지리산 바래봉의 철쭉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지리산둘레길’ 2코스 인월~운봉 트레킹 구간이 바로 저 길로 가지만 나와는 이정표가 다르다. 나는 물길을 어서 달려 섬진강에 업혀야 한다.
은하수가 내려앉은 ‘요천’ 강가 광한루와 오작교
이백교를 지나 남원시내에 접어들어도 강둑은 고요하다. 오랜 세월 급류에 씻겨내려 기기묘묘한 모양과 문양의 암반들이 강바닥을 넉넉하게 차지하고 있는 요천이 새롭다. 적어도 이렇게 자연미가 갖추어진 강바닥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시, 군청 소재지라면 온갖 공사로 원래 모습을 찾기 어려운 게 보통이다. 아마도 그렇게 하기에는 요천 강바닥이 너무나 거대한 자연암반 공원 같아서 손대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리산의 마지막 서북향 정혈이 이쯤해서 용틀임하듯 굳은 의지를 보인 바위들이라 남원이 더 믿음직스럽다.
춘향교 근처에 막은 보는 계절적으로 수량의 편차가 큰 요천의 물을 가두었다. 그래야 광한루원이 있는 쪽에서 다리를 건너 춘향테마파크로 가는 발치에 물 구경을 좀 할 수 있을 테니까. 부처님오신날 등불을 밝힌 강물 위에 춘향과 이도령이 탑과 함께 고요히 떠 있다.
세월호 참사의 파도는 온 나라를 집어 삼켰다. 남원이라고 예외일 리가 없다. 춘향제는 기약 없이 연기되었고, 하얀 바탕에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합니다’라고 쓴 검정 글씨는 곳곳에 만장처럼 펄럭거렸다. 더러는 춘향제의 무기연기를 알고도 왔고, 더러는 모르고 와서 실망한 관광객이다. 올해로 84세를 맞게 되는 춘향제의 하이라이트 ‘미스 춘향’ 선발도 미뤄졌다. 그러나 광한루원의 입장권을 사려는 줄은 길고 길었다. 진도 앞바다의 슬픔이 온 국민의 아픔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 사람의 숙명이다.
화창한 계절이 가족들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중국 관광객들의 억센 사투리가 성조까지 더해져 더 북적거린다. 오작교를 건너는 사람들은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지만 잉어 떼에 눈을 떼지 못한다. 날은 봄날이지만 춘향의 그네가 푸른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풍경을 상상할 수도 없도록 사람들은 밀려든다. 스마트폰으로 연인의 얼굴을 남기려는 셀카의 긴 팔이 춘향의 어깨에 한 팔을 올리고 멀리 성 밖을 가리키는 이몽룡의 합죽선 날과 일치할 뿐이다.
이도령도 춘향이도 실존인물이다. 이도령은 남원부사 성안의의 아들 성몽룡이니 성춘향과 동성동본이란다. 결혼이 아니라 연애라 하더라도 양반체통에 동성동본이 말이 되는가. 소설속의 이몽룡은 그렇게 성을 바꾸어 탄생했다. 원래 춘향은 절세가인은커녕 추녀였단다. 이도령과 정을 통했으나 한양으로 간 이도령은 끝내 돌아오지 않아 춘향이 죽어 원귀가 되고 남원 땅에는 3년 대흉이 들었다는 ‘신원(伸寃) 설화’가 전해온다. 결국 춘향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판소리 ‘춘향전’이나 소설에서는 해피엔딩으로 위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극적인 무대는 은하수의 모양을 하고 있는, 하늘에서 바라본 ‘요천’이다. 그래서 이 땅으로 내려온 ‘미르 내’ 가운데는 1년 내 애태우다 칠월칠석에나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자리한다. 요천에는 견우를 상징하는 ‘우암(소바위)’과 직녀를 상징하는 ‘능구도’라는 섬이 비련의 실존으로 남아 있는 것이란다.
한양으로 시집간 성춘향은 남원 땅에 돌아올 리 없건만, 여전히 별거중인 견우와 직녀는 올해도 분명 이 요천 강가, 광한루 오작교에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달 속의 항아가 살고 있는 상상 속의 전각, 그 현존이 바로 조선조 정인지가 이름붙인 ‘광한루’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다리 오작교는 그 애절한 사랑의 무지개다리인 것이다.
광한루 동편에 있는 춘향의 사당 앞으로 가다 보면 비석의 사열을 받게 된다. 남원골을 거쳐 간 나리님들의 송덕비이다. 그 가운데서 한결같은 돌림자 문구가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얼마나 빛나는 공덕이기에, 얼마나 민생을 구휼하였기에 세세손손(世世孫孫) 잊지 못한단 말인가. 심한 과장이다. 어쩌면 후임 사또의 눈치를 보면서 전관의 선정을 미화시켜 인사치레로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전임자가 떠나고 나면 기념식수 팻말을 냉큼 뽑아 뒤뜰에 모아 놓는 이즘 세태와도 닮았다. 그저 못 믿을 세상에 살다보니 얻게 된 의심병이 도진 거다.
섬진강으로 가는 길이 머니 발길을 재촉한다. 춘향이 만큼이나 전국에 널리 알려진 것이 ‘남원 추어탕’이다. 남원 가운데서도 광한루원 근처에는 한집 건너 추어탕 집이다.
추어탕은 경상도식, 전라도식이 다른데 대표주자인 원주추어탕이 경상도식에 가까우면서 고추장으로 맛을 내고, 남원추어탕은 된장과 들깨로 끓여내는 점이 특징이다. 특별히 서울식은 고기육수에다 육개장처럼 끓여 내 추탕이라고 부른다. 고인이 된 북한의 연형묵 전 총리가 서울에 와서 연이틀 먹었다는 추탕, 평생을 그리워한 용금옥 추탕이 그것이다. 그 원료인 미꾸라지도 원래는 미꾸리와 미꾸라지로 색깔과 몸체형태에 따라 구별한다고 하나 같이 대조하기 전에는 식별이 쉽지 않다.
요천자전거길은 여전히 공사 중
남원 시내를 벗어나면 요천은 넓어진 만큼 물도 풀섶 사이로 숨는다. 갈수기인 탓도 있겠으나 요천은 원래 수량이 넉넉한 강이 아닌 듯도 싶다. 이미 관청에서는 ‘요천자전거길’이 완공되었다고 자랑을 했다. 만경강에 연이어 요천 여행을 계획하게 된 것도 새로 난 자전거길이 얼마나 좋은가 타보기 위한 것이었으나 시작부터 실망이다.
요천으로 합류하는 소하천 마다 건너가는 자전거 전용교량은 아직 건설 중이었다. 특히 남원 위생사업소에서 주생역 가까운 구간에는 서너 군데가 공사 중이라 내려야 했다. 좀 더 넉넉하게 기간을 잡았어야 할 것을 혹여 춘향제에 맞춰 서둘러 보도자료부터 뿌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완공 후 자전거길은 더 편하게 섬진강을 만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주생역 앞 들판을 지나 금송교에 이르면 들판 한가운데로 파란 지붕의 다소 덩치 큰 건물이 보인다. 한 맥반석 찜질터 자리다. 지금이야 맥반석 찜질이 워낙 흔하고, 우리의 찜질방문화가 한류 휴식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낯설다.
나와 함께 전라도 일대를 여행하던 친구는 남원의 국도 옆에 차를 멈췄다. 들판에 덩그러니 앉은 가건물에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냥 입던 옷을 벗고 팬티와 러닝셔츠 차림새로 커다란 적벽돌 화덕 곁으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남녀 구별이 없었다. 주로 중년의 시골 아낙들이었다. 수건 한 장으로 연신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어떤 이들은 내의를 걷어 올려 아랫배를 허옇게 드러내고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내장까지 맥반석의 좋은 성분이 들어가 땀으로 배출된다는 거야. 특히 부인병과 암 치료에 좋다고….” 그러고 보니 유난히 병색인 사람들의 모습도 더러 보였다. 그 땀을 씻지 않고 그대로 식혀야 좋다는 현장 정보에 따라 땀에 젖은 채 옷을 입고 떠난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맥반석 찜질은 전국으로 유행처럼 번졌다. 유행이 그렇듯 시절이 가고나면 또 심드렁해진 탓일까. 그 맥반석 회사도 몇 번인가 망하고, 주인이 손바꿈되었다고 전한다. 원조 맥반석 찜질방은 순전히 금지면 서매리에 맥반석 광산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섬진강자전거길과 만나는 요천대교
하도 우리네 곁에 ‘금지’된 사안이 많아서 일까, 한글로 ‘금지’의 느낌은 그저 서늘하다. 그러나 금 연못(金池)이니 이게 보통 이름인가. 역사의 보배 같은 한 인물이 여기서 태어났다.
김주열 열사, 금지면 옹정리 석정마을에 그의 묘가 있다. 젊은이들에게 생소한 인물일지라도 그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를 몸으로 고발하고 떠났다. 마산상고 1학년생이던 17살 소년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름으로써 이승만 정부는 손을 들고 만다. 전라도 남원 땅에서 마산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부농이던 집안도 그의 죽음과 함께 기울고 말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 또한 고리봉(709m)의 정기를 타고 난듯하다.
물이 넉넉하던 시절, 소금배는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남원성 동쪽의 오수정까지 왔었다. 고리봉 동쪽 절벽에 쉬어가던 소금배를 묶어둔 고리(環)가 있어 고리봉이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섬진강과 요천의 합수머리에 온전히 700여m를 솟아 있으니 예사 웅자(雄姿)가 아니다. 몸을 불살라 대하소설 ‘혼불’을 쓰고 꺼져간 최명희, 그 소설의 무대 중 하나인 매안마을, 거멍굴, 고리매미 역시 고리봉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어간이다. 미리 지형의 뿌리를 역사와 함께 머리에 두고 자전거를 타면 산천의 별의별 것들이 다 눈에 들어온다.
요천대교는 섬진강을 눈앞에 둔 요천의 종점이다. 섬진강댐에서 출발하거나 광양 하구에서 출발하거나 간에 섬진강 자전거객들이 거쳐 가야하는 지점이다. 때마침 긴 연휴를 맞은 청년들의 건강한 웃음이 강둑의 정자에 끊이지 않는다. 4대강 종주를 대개 마치고 +1으로 섬진강자전거길을 꼽는다. 마지못해 끼워주는 원플러스 상품이 아니라 두꺼비처럼 복 받은 강변 풍경이 다시 이어지는 기점이다.
자료제공·자전거생활
참고자료·'물의 전설', 천소영·김동현, 2000, 도서출판 창해. '디지털 남원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