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블라인드 너머… 가려진 사회 문제를 담다

지난 16일(현지 시각) 오후 스위스 바젤의 메세플라츠 제1전시관. 세계 최대 아트 쇼인 '아트 바젤'의 대규모 설치 전인 '언리미티드(Unlimited)' 막이 오르자 전 세계에서 날아온 미술계 VIP들이 스위스 건축가 그룹 헤르조그 드 뮤론이 설계한 은색 알루미늄 건물로 빨려 들어갔다.

리처드 암스트롱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장, 오쿠이 엔위저 2015 베네치아 비엔날레 총감독 등 세계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는 인사들을 전시장 입구 맨 앞에서 기세등등 맞이하는 작품이 있었다. 색색의 블라인드가 공중에서부터 지상까지 10여m를 채우며 전시장 입구 800㎡(약 242평) 공간을 수놓고 있었다. 재독 한국 작가 양혜규(43·사진)의 작품 '서사적 분산(分散)을 수용하며-비(非)카타르시스 산재(散在)의 용적에 관하여'였다.

"전시장 입구가 뭘 상징하겠느냐. 우리가 그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 위치가 말해준다." 마크 스피겔러 아트 바젤 디렉터가 눈을 찡긋했다. 프랑스 파리 샹탈 크루젤 갤러리의 크루젤 대표는 "그녀는 한국 미술계의 국보(national treasure)"라고 했다가 얼른 "아니 국제 미술계의 보물(international treasure)"이라고 '수정'했다.

양혜규는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1994년 독일로 건너가 활동하고 있다. 일상의 소재로 복잡한 철학적 개념을 표현한다. 2009년엔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됐고, 아트 바젤 전시는 2007·2010년에 이어 세 번째다.

"결혼 알선 장에 나가는 기분이다. 워낙 내겐 특별한 작품이라…." 이날 개막에 맞춰 베를린에서 부랴부랴 날아온 양혜규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독일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 미술관이 재개관 기념을 하면서 첫 작가로 양혜규를 선정했을 때 만든 작품이다. 그는 "그곳이 나치가 생각하는 권위, 엄숙주의가 응축된 건물이었기에 볼륨에 집착하게 됐다"고 했다.

그 작품을 이번 전시장 높이에 맞게 조금 키워서 들고 나왔다. "공을 많이 들인 작업이라 더 큰 데 내놓고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생명력도 지속하고…." '결혼 알선'이란 말은 자신이 낳은 자식과도 같은 이 작품이 이번 전시를 통해 좋은 미술관을 만나 걸렸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에서 온 표현이었다.

모티브는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다.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격동의 역사를 자신의 몸에 새겨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재일교포 서경식 교수의 저서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에서 영감을 얻었다. "전쟁, 이민, 빈부격차 같은 수많은 이유로 고국을 떠나 사는 이들이 산재해 있다. 별개의 문제 같지만 하나의 서사(epic) 아래 연결된 이슈다. 틈 사이로 건너의 존재를 볼 수 있는 블라인드로 그 포용을 설명했다."

작품 정면에 서면 강렬한 조명이 원색 블라인드에서 튕겨 나와 눈이 아찔해진다. 작가가 말하는 '장님 포인트'다. 작품 맨 뒤 중앙에 서면 모든 블라인드가 균일하게 열려 보인다. '히든 포인트'다. "커다란 담론이라 생각했던 게 의외로 소소할 때가 있더라. 앞에선 꽉 닫혀 보였던 블라인드가 옆으로 가면 막상 아주 얇은 존재였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편협한 사고의 장님(blind)에게 들려주는 블라인드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