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6.25 09:55

Memories

까치발을 들며 통에서 꺼내 먹던 아이스케키, 대청마루에서 할머니 다리를 베고 누워 받던 은근한 부채질, 우물가에서 받던 뼛속까지 시린 등목, 친구들과 멱감으러 가던 십리길…. 그 옛날 여름은 에어컨이 없어도 시원했다. 우리를 시원하게 해준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떠나보자.


호두나무 꼭대기에 불던 바람

코흘리개 시절, 여름방학이면 가던 천안 광덕산 기슭. 지금도 호두과자의 명성을 호령하는 호두나무. 그 그늘의 추억에 잠기노라면, 한여름 찜통더위쯤이야 시원스레 잊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버리곤 한다.반바지 까까머리 아이들이 제 키의 열 배가 넘는 호두나무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건, 나무타기 실력을 뽐내거나 제 주먹보다 작은 호두를 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무 꼭대기에서 산과 구름이 맞닿은 곳을 바라보며, 거기 무엇이 있으며 누가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이었던지! 상상의 날개를 훨훨 펼치노라면, 어느덧 솔솔 부는 바람결을 타고 꿈나라도 가곤 했다. 하늘 가까운 꿈속에선 언제나 훌륭한 어른이 되어 있었고. 단꿈을 깨면, 으레 호두나무 밑 개울가로 풍덩 뛰어들었다. 깔깔깔 물장난 끝엔, 아이들은 너나없이 갓 영근 시퍼런 호두 알갱이 껍데기를 물속 손돌멩이살에 비벼댔다. 아이들 손톱만큼이나 보들보들한 호두 알갱이, 하하, 어느새 멋진 간식거리가 되어가고.‘행복함을 잊고 지내는 삶이 아름답다’는 듯, 호두나무 꼭대기에 불던 바람은, 아무리 덥다손, 지금도 이 마음 한켠 미소를 향해 계속 불어대는 것이었다. 김봉길(아산티맨홍그룹 이사·시인)


손목에 얼음 놓고 누가누가 오래 버티나

70년대는 서울도 당나귀나 노새가 수레를 끌고 다니던 시절이다. 동네 가게에서 얼음을 팔았다. 속이 훤히 보이는 큼지막한 직사각형 얼음은 쳐다만 봐도 시원했다. 그 얼음덩이를 만져보면 손이 상쾌할 정도로 반질반질하게 미끄러웠다. 얼음을 달라고 하면 가게 아저씨가 슬근슬근 톱질하여 얼음을 잘라 팔았다. 서울의 동네마다 사람들이 잘 모이는 나무 탁자는 다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 아이들은 빛을 따라 날아다니는 날벌레처럼 그곳에 모였다. 어느 여름인가 조그만 얼음덩이를 가지고 손목의 굵은 핏줄 위에 올려놓고 오래 버티기 경쟁이 벌어졌다. 얼음은 차갑다. 여름의 한복판에서도 그 기세는 서슬이 퍼랬다. 하얀 팔뚝의 여자애와 대결을 했다. 아직 녹지 않은 말짱한 모양의 얼음을 골라 올려놓는다. 애들이 입을 모아 하나, 둘, 셋하고 시간을 잰다. 손목의 감각이 얼얼해갔다. 추운 겨울에 찬 물에 발을 담갔을 때 발이 순간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여름에 팔뚝에 올려놓은 얼음도 못지않게 맵고 차가웠다. 얼음을 툭툭 털고 보면 얼음에 닿은 피부가 냉랭해졌다. 얼음이 맑은 물이 다 되도록 하얀 손목 저편의 조그만 주먹은 단단해져만 갔다. 정종온(번역가)


한밤의 아이스케키 파티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30℃를 오르내리는 불볕 더위에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이제 겨우 유월 초입인데 날씨도 우리 민족성을 따라가는지 늘 ‘빨리, 빨리’를 외치는 우릴 닮아 이미 한여름이다. 집 근처 슈퍼마켓에 들러 멜론 맛 나는 하드를 사서 한입 베어 문다. 사르르 녹으며 입안 가득 멜론 향과 함께 서늘함이 온몸으로 퍼진다. 참 좋은 세상이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먹고 싶다고 냉큼 사서 먹을 수가 없었으니 참 좋은 세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아이스케키! 사카린으로 단맛을 내어 막대를 끼워 얼린 얼음과자다. 너나없이 가난한 시절, 아이스케키 하나 얻어 먹긴 밤하늘의 별 따기였다. 감히 사달라고 입도 못 벌리던 시절, 손아래 동생이 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곧 들어오겠지 하면서 별 걱정 안 하던 어머니가 밤이 이슥하자 동생을 찾아 나가셨다. 한참 뒤, 엄마 손에 잡혀온 동생은 어깨에 하늘색 아이스케키통을 메고 있었다. 아니 아이스케키통이 4학년짜리 동생을 끌고 오는 형국이었다. 아버지의 호통에 털어놓은 동생 이야기는 요즘 말로 아이스케키 아르바이트를 했단다. 100개를 받아 팔러 나섰는데 판 것은 20여 개. 자기가 몇 개를 먹었는데 그 숫자는 모르겠다며 펑펑 울어댄다. 그날 밤, 우리 집에선 때 아닌 아이스케키 파티가 벌어졌다. 이미 녹아내리기 시작한 아이스케키를 동네 사람들까지 불러다 입안이 얼얼하도록 먹었다.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깊은 여름밤, 평상에 둘러앉아 벌였던 아이스케키 파티. 이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아름다웠던 밤이 그립다. 조규옥(초등 교사)


입술이 시퍼래져 덜덜 떨던 한강 물놀이

어릴 때 우리 가족은 한강 광나루나 뚝섬유원지에서 하는 물놀이가 여름철의 유일한 피서였다. 강변에는 느티나무가 길게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겁도 없이 푸르고 넓은 한강에 첨벙 뛰어들어 형제들과 물싸움을 벌이고, 마구 뛰던 어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하루 종일 물속에서 개구리 헤엄을 치면서 풍덩풍덩, 호호하하 정신없이 놀다 보면 모두 입술이 시퍼래져서 덜덜 떨던 기억들. 이보다 더한 피서가 어디 있을까? 솜씨 좋은 내 엄마는 물놀이 가는 날이면 층층 찬합에 찰밥과 각종 반찬을 만들어 점심을 준비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에게 시장에서 떠온 예쁜 무늬의 포플린으로 원피스를 해 입히기도 하셨다. 그때는 특별히 수영복이라는 게 없어서 작은 아이들은 팬티를 입고 조금 큰 아이들은 러닝에 팬티를 입었다.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다가 석양이 서편 하늘에 붉게 물들어야 강을 떠나오곤 했다. 물에서 놀 때는 몰랐는데 집에 오는 길부터는 등짝이 가려운 듯 따가운 듯…. 그런 날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어나보면 벌건 등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화상을 입었음에도 그때는 그걸 화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햇볕에 살이 익어서 그러니 괜찮을 거라고. 지금 아이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리라. 며칠은 고생하지만 그래도 여름날 한강 물놀이만큼 좋은 피서가 없었다. 이옥순(주부)


워터파크보다 아찔했던 뒤로 다이빙

“폭포에서 뒤로 다이빙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내겐 생애 가장 보물 같은 추억이자 최고의 피서였기에 날이 더워지면 절로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취학 전 나의 신나는 피서지는 외갓집의 개울이었다. 외갓집 앞 너른 배밭의 발치부터 소달구지 정도 다닐 만한 흙길이 나 있고, 그 아래 개울이 흘렀다. 풍성한 흐름을 가로질러 구축해놓은 턱으로 인해 개울물은 갑자기 90도 아래로 떨어지며 폭포를 이뤘다. 적어도 네댓 살 꼬마에겐 폭포나 다름없었다. 고운 모래가 깔린 폭포 아래는 물이 가슴께나 차올랐을까. 동네 아이들 대여섯 명이 한바탕 놀기에는 요즘의 워터파크 저리 가라였다. 하이라이트는 ‘다이빙’이었다. 먼저 근처 풀에서 하얀 솜털 같은 걸 따서 돌돌 말아 귓속에 넣는다. 그리고 개울 양편의 경사면을 딛고 물 턱 위로 올라서서 한 손으로 코를 쥐고 고개를 젖혀 뒤로 뛰어내렸다.첨벙! 아이들과 번갈아 몇 번 하다 보면 입술이 파래졌다. 그런데도 계속하고 싶어서 밥 먹으라며 나를 찾는 외할머니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폭포의 물줄기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물의 커튼이 쏴아 드리워지던 그때 그곳, 파라다이스 냉장고였나니!   성진선(자유기고가·번역가)


돈 버는 재미에 더운 줄도 몰랐던 여름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스케키(얼음과자)를 팔면 김일 레슬링도 볼 수 있고, 아이스케키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동네 선배의 사탕발림에 꼬여서 공장으로 갔다. 양철판에 스티로폼을 넣어 만든 묵직한 통에 아이스케키 20개, 하드(전지우유로 만든 부드러운 얼음과자) 20개, 모나코(쮸쮸바 형태의 얼음과자) 10개를 담아주며 팔다가 더우면 먹으라고 아저씨가 덤으로 아이스케키 3개를 더 준다. 7월 한여름 오전 11시부터 케키통을 들고 길음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아~이스케키~이! 하드나 석빙고~” 를 외치며 시작한 장사는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다 팔고 나면 얼굴은 벌겋게 타오르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지만 내 손에 쥐어지는 20~30원을 보면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 옥수수빵을 받을 때처럼 흥분되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밤에 한 번 더 팔러 나가면 거금 40~50원이 들어왔다. 만화방으로 달려가 10원을 내고 만화를 무제한으로 보면서 김일 레슬링을 기다리는 시간은 나에게는 꿈만 같은 행복이었다. 그래도 내 주머니에는 40원 정도 남아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동생들을 위해 수박 한 통을 사가지고 휘파람을 불며 간다. 어머니가 등목을 시키며 무슨 돈으로 수박을 샀냐? 하루 종일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녔길래 몰골이 이러냐고 꾸지람을 해도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여름 방학이 지날 무렵 내 은행 통장에는 거금 천원이 넘게 저축이 되었고, 은행 창구의 예쁜 누나는 “우리 부자 꼬마 아저씨 또 오셨네” 하고 반겨주던 그 여름이 나에게는 너무나 시원했다. 정은조(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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