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일상, 복잡한 點 아래 숨어있네

원색 물감층으로 뒤덮인 가로·세로 2m가 넘는 큼지막한 캔버스들이 눈을 시험한다. 거대한 물감 덩어리를 한참 뚫어져라 들여다보면 매직 아이처럼 표피의 물감층이 솟아오르며 아래로 중첩된 일상의 공간이 도드라진다. 쏟아지는 햇살을 스펀지처럼 흠뻑 빨아들인 포근한 소파, 방금 모닝 커피 한 잔의 임무를 끝내고 싱크대 위를 뒹구는 머그잔…. 도려낸 집 안 풍경이 여러 개의 네모로 분할돼 캔버스 화면을 채웠다. 이 '일상의 콜라주'는 다시 밝은 원색의 점으로 덮인다. 색을 만나 한없이 밝고, 평화로워진 일상이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현대인에게 집은 가장 중요한 안식처다. 육체와 정신이 쉬는 공간이다. 빛을 담은 평온한 실내 모습으로 보는 이들에게 안식을 주고 싶었다."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25주년 개인전 '미학 오디세이 25년'을 열고 있는 최인선(50·홍익대 미대 교수·사진)이 신작 '날것의 빛' 시리즈 앞에서 말했다. 관객들에겐 생기를 전하겠다지만 정작 그는 지친 표정이었다. 지상 1층부터 지하 4층까지 전시장 5개 층에 작품 630점을 전시하느라 녹초가 돼 있었다.

최인선은 다양한 양식과 물성을 탐구한 작업으로 2002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2003년 하종현 미술상 등을 받은 작가다. 발암 물질인 아닐린을 포함한 검은 안료를 많이 써 5년 전엔 방광암 수술까지 받았을 정도로 치열하게 작업했다. 쉼표 없이 25년을 달려온 그는 43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전시에는 작가가 실험한 여러 양식의 작품들이 연도와 상관없이 섞여 있다. 돌가루, 안료, 쇠, 시멘트 같은 질료를 활용한 초기의 추상 작업과 근래 한층 밝아진 구상 작업이 나란히 놓여 있다. 관람객들이 작업 스타일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면서 스스로 그간 해온 실험들을 반추하기 위해서 택한 전시 방식이라고 했다.

많은 작가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원색에서 모노톤으로 진화하는 데 비해 최인선은 역방향을 택했다. "90년대 해온 거대 추상이 망망대해에서 띄운 나뭇조각 같은 작업이라면, 요즘 작업은 투명한 물 위에 떨어진 낙엽 같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심오한 정신적 층위도 중요하지만 관객과의 소통도 중요하단 걸 깨달았다."

630점을, 그것도 400여점을 신작으로 채워 전시하는 건 웬만한 다작 아니고선 힘들다. "한 작품에 매달리지 않고 동시에 2~5개 작품을 같이 한다. 애지중지 독자(獨子)를 키우듯 작품 하나에 매달리면 매몰되기 십상이다." 캔버스, 물감 같은 미술 도구가 두려운 존재가 되면 안 돼 틈만 나면 낙서라도 한다는 그다.

25년의 짧지 않은 화업 인생, 그에게 그림은 어떤 의미일까. "그림은 곧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동시에, 그림 팔아 생긴 수익을 진짜 생명을 살리는 데 쓴다. 7년째 어린이들의 개안(開眼) 수술을 돕고 있다. "예술이라는 게 결국 정신 영역을 터치해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 아닌가. 작은 재능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가 빚은 '날것의 빛'은 어린 생명에게 '세상의 빛'을 돌려주고 있다. 전시 8월 5일까지. (02)733-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