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듯 꽉찬 우리 단색화… 중국 대륙도 반해 버렸네

지난 27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상하이 창닝(長寧) 지역의 SPSI(상하이 조소유화원) 미술관. 눅진한 바깥과는 대조적으로 미술관 안엔 담백한 기운이 감돌았다. 중국 건축가 왕얀이 3년 전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설계한 미술관 1, 2층에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한 색깔 톤으로 차분하게 스스로를 낮춘 한국 단색화(單色畵) 70여점이 걸렸다. 그림 사이사이, 보름달같이 넉넉하고 검박한 달 항아리가 쉼표를 찍었다. 이날 개막한 한국 단색화 그룹전 '텅 빈 충만―한국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 풍경이다.

전시는 문화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가 K팝으로 시작된 한류를 확산하기 위해 해외 한국문화원과 마련했다. 기획을 맡은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미술 한류'의 신호탄을 쏘겠다는 포부 아래 최근 국내외에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단색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권영우·윤형근·정창섭·정상화·하종현·김택상·박기원 등 11명의 회화 작품과 권대섭·김익영·문평 등 도예가 5명의 달 항아리가 어우러졌다. 상하이 한국문화원에도 소품들이 전시됐다.

개막식을 찾은 중국 문화계 인사들은 구상화가 강세인 중국에선 아직 생소한 장르인 단색화를 주의 깊게 봤다. "간단해 보이나 절대 간단치 않은 그림이군요. 엄청난 수련으로 일군 화법(�法)이에요." 중국 원로 화가 셴톈완(沈天萬·83)씨가 물감을 중첩해 평면성을 표현한 최명영의 '평면조건'을 찬찬히 보며 감탄했다. "웨민쥔 같은 중국 작가는 강렬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그림에 담는데 한국 단색화는 은유적으로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 같아요." 중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중 하나인 웨민쥔과 친구라는 왕정징(王正晶) 항저우시 문화 담당관은 "K팝·한식(韓食)이 한국 문화의 전부가 아니었다"며 웃었다.

단색화는 이미지를 그리는 대신 단일한 색조로 작업을 반복해 평면을 표현하는 추상 기법이다. 1970년대 한국 회화의 큰 줄기를 이뤘다가 최근 재주목받고 있다. 참여 작가로 개막식에 참석한 최명영 홍익대 미대 교수는 "비슷한 시기 나온 서구의 '미니멀 아트'는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작업하는 '결과의 예술'이고, 일본의 '모노하(物派)'는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하는 '관계의 예술'이었다. 한국의 단색화는 끊임없이 반복해 작업하는 '과정의 예술'이다. 묵언수행과도 같은 우리 단색화의 정신이 이제야 빛을 보는 것 같다"고 기뻐했다. 류만원(劉曼文) SPSI 관장은 "텅 빈 것 같지만 내면의 무언가가 보이는, 중국에선 아직 보지 못한 스타일"이라며 "작가의 정신성이 관객들에게 평온한 감동을 준다"고 했다. 전시는 18일까지 열린다. 이후 독일·헝가리·폴란드·인도네시아에서 순회전이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