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직원들 "외국서 온 지사장 반대"… 한국식 스킨십으로 풀어

내 사무실 캐비닛에는 10년이 다 돼 빛이 바래가는 문서가 한 장 들어 있다. 가끔 꺼내 보면 험난했던 나의 한국 정착기가 떠오른다.

2005년 2월, 다시 밟은 고국 땅은 매서운 한파로 얼어붙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30여년 만에 귀국한 길이었다. 살을 파고드는 칼바람이었지만 마음만은 들떴다. 고국에서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니 차가운 공기는 상쾌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그날 저녁 자리 전까지는 그랬다.

새로 부임한 회사는 미국계 인터넷 회사의 한국 법인이었고, 나는 지사장을 맡았다. 귀국 첫날부터 그 회사 고위 임원과 상견례를 겸해서 저녁 식사를 했다. 정중한 초대에 기쁜 마음은 잠시였고, 곧 이어진 대화에는 바깥 공기보다 한층 매서운 냉기가 감돌았다.

"제임스, 당신은 두 달 안에 실패하고 짐을 쌀 것이오."

그의 독설은 이어졌다. "당신은 한국에서 학교를 나오지 않았소. 친구도 없고 네트워크도 없으니 실패는 뻔합니다. 그런 당신을 누가 믿겠소. 파트너도 다 떠날 것이오."

충격이었다. 첫 출근을 하루 앞둔 그날, 밥이 어떻게 넘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머릿속은 텅 비어갔다.

그러나 더한 충격은 그 뒤였다.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업무 파악하랴, 한국 생활에 적응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니 두어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제야 미국에 떨어져 있던 가족의 귀국을 준비할 여유가 잠시 생겼는데, 문제의 '문서'가 내 자리에 당도했다. 나의 지사장 부임을 반대한다며 임원을 포함해 여러 직원이 서명한 '연판장(連判狀)'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경영인으로서 직원들의 이런 집단 반발은 들어 보지도 못한 경우였다.

첫날 저녁, 그 임원이 내뱉었던 말들이 생각났다. 이것은 내 면전(面前)에 던져진 집단 독설이었다. 비록 미국 땅에서 오래 살았지만, 평생 김치를 먹고 살아온 내가 이런 일을 당하니 모욕감을 떠나 억울했다. 그러나 마냥 서글퍼할 수만은 없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수십 년 만에 찾은 고국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직원들과 한국식으로 스킨십을 갖고 내 진심을 전달하기로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 간(肝)은 생간이니 모두 덤벼라"를 외치며 모든 부서와 술자리를 가지기 시작했다. 죽기 살기였다. "폭탄주가 뭔지나 알겠느냐"고 비아냥거리던 직원들이 하나둘씩 나가떨어졌다. 술이 한 잔씩 돌 때마다 팽팽했던 긴장과 반목(反目)이 조금씩 풀어졌다.

낮에는 좋아하는 스포츠를 하면서 직원들과 땀을 흘렸다. 상금을 걸었다. "나와 탁구 쳐서 이기는 직원에게는 그 자리에서 10만원을 주겠다."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어릴 적부터 다져진 실력이 있어 사실 큰돈은 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나를 이겨 보겠다며 탁구 학원까지 다니는 직원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열정에 감화됐다. 이기고자 하는 열망, 한국적 파이팅 정신이 내 안에도 스며들었다. 내 진정성이 통했는지, 내게 둘러씌워진 '이방인'이라는 굴레가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임원들도 하나둘 내 의견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임직원이 서로를 신뢰하고 똘똘 뭉쳐 단합하자 회사 실적은 급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1년, 실적은 전년보다 두 배가 뛰었다. 다들 나를 믿고 열심히 뛰어준 덕분이었다. 한국의 다른 계열사는 물론이고 일본 법인까지 경영을 맡게 됐다.

이후 한국마이크로소프트(한국MS)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역할은 단순했다. 우리 고유의 '파이팅' 정신을 일깨워 주는 게 주 임무였다. 어릴 적 영웅이었던 홍수환 선수가 떠올랐다. 전 직원을 모아 홍 선수의 권투 경기 장면이 담긴 흑백 비디오를 함께 봤다. 승부욕을 일깨우기에 이보다 좋은 게 없었다.

이듬해 한국MS는 미국 본사가 해외 법인들을 평가해 시상하는 최우수 법인상을 받았다. 각국에서 온 2만여 직원이 참가한 시상식에서 우리는 무대에 올라 태극기를 휘날렸다. 한국MS는 3년 연속 이 상을 받았고 그때마다 태극기가 등장했다. 한복을 입고 퉁소까지 불며 태극기를 흔드는 우리 직원들은 근성의 상징이 됐다. 이런 직원들 덕분에 나는 어느 나라의 누구를 만나든 언제나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한국인은 세계 최고 인재"라고.

이렇다 할 지연(地緣)이나 학연(學緣)이 없는 나는 한국에 와서 숱한 편견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를 이겨낸 원동력은 역설적으로 한국인 DNA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기고자 하는 열망, '위닝 스피릿 (Winning Spirit)'은 내가 한국을 묘사할 때 곧잘 쓰는 용어다.

최근에는 그런 한국인 DNA를 적극 수출하고 있다. 우리 직원들이 본사는 물론이고 동남아, 일본, 유럽 등에 나가서 활약하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 나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회장도 맡게 됐다.

나를 '이방인' 취급하며 배척했던 그 문서는 지난해 새로 이사한 사무실의 캐비닛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에는 상처가 됐지만, 돌이켜보면 내 안의 위닝 스피릿을 일깨워준 고마운 문서다. 이 문서가 10년째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이유다.


[김 제임스 한국MS 대표는]

김 제임스(52·한국명 김정우)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 대표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길지만 아직도 구구단을 외울 때면 영어보다 한국어가 먼저 나온다"고 말하는 '토종 한국인'이다. 1962년 한국에서 태어나 8세 때 미국계 보험사에서 일하던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갔다. UCLA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IBM, AT&T 등을 거쳐 2005년 귀국했다. 2009년부터 한국MS 대표를 맡고 있다. 공격적인 경영으로 MS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최우수 법인'에 선정되는 성과를 올렸다.

올 1월에는 한국계 최초로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회장에 취임했다. 취미는 구력 40년이 넘는 테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