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변경' 속 삼남매, 정체성 더 명확해져"

소설가 이문열(66)씨가 대하소설 '변경'(邊境·전 12권) 개정판을 민음사에서 냈다. 1950년대부터 1972년 유신 선포 때까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다룬 대작이다. 제목 '변경'은 남북한이 각각 서쪽 제국(미국)과 동쪽 제국(소련)의 변경에서 냉전 체제의 이념 선전장이 된 상황을 가리킨다. 작가는 1986년부터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 1998년 조선일보에 마지막 3부를 연재한 뒤 책으로 펴냈다.

KBS가 120회 TV 드라마로 제작하려 했지만 김대중 정부 시절 '보수 작가'로 낙인찍힌 탓에 무산됐다. 2001년 '책 장례식' 사건까지 당한 작가는 실의 끝에 2003년 소설 '변경'을 절판시켰다. 그는 "1980년대를 다룬 소설 3부작을 쓰려고 하다 보니 그 앞 시대를 다룬 '변경'의 미흡한 부분을 고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마지막 12권을 대폭 고쳐서 집필 28년 만에 완성본을 냈다.

작가 이씨는 '변경'에 해설을 쓴 평론가 류보선 교수(군산대 국문과)를 서울 신사동 민음사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류 교수는 "소설 '변경'의 귀환이 반갑다. 이문열 문학의 모든 모색이 들어 있는 필생의 역작"이라고 말을 건넸다. '변경'은 월북한 아버지를 둔 명훈·영희·인철 세 남매의 인생 유전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명훈은 연좌제에 묶여 사회 진출이 막히자 폭력배로 방황하다가 도시 빈민을 거쳐 계급의식에 눈을 떠 광산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추진한다. 그러나 노사분규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허망하게 삶을 마감한다. 영희는 신분 상승을 꿈꾸면서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1970년대 부동산 투기로 자산가 계층에 합류한다. 동생 인철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지적(知的) 방황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다.

류 교수는 "개정판에선 세 남매의 정체성이 더 명확해졌다"고 풀이했다. 작가 이씨는 "인철은 제 분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명훈과 영희는 완전한 허구 인물"이라며 "우리 가족이 연좌제에 얽매인 상황만 소설 속에 살렸을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명훈과 영희는 자본주의사회의 기본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를 상징하기 위해 지어낸 인물이란 얘기다. 그러나 인철은 기본 계급의 대립을 비판하는 중간 계급의 지식인으로서 작가 이문열의 자화상(自畵像)을 반영하고 있다.

류 교수는 "이 소설은 1960년대 이후 한국 지성사(知性史)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이씨는 '남한 좌파의 계보'론을 펼쳤다. "미전향 장기수 중엔 1946년에 번역돼 나온 '자본론'을 줄줄 외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을 감옥에서 만난 젊은 학생들이 남한 좌파의 전통을 이었다. 그러다가 운동권에선 '우리의 적(敵)은 전두환이고, 그 적의 적인 김일성은 우리 편'이라고 해서 주사파가 등장했다. 그런 좌파의 진영 논리와는 거리를 둔 '이상적(理想的) 자유주의자' 세력도 있다. 나는 중간 계급에 속한 작가가 사회를 인문학적으로 통합하는 꿈을 품고 산다"라고 덧붙였다.

'변경'은 냉전 체제의 주변부인 남한에서 지식인이 무엇을 고민했고, 민중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술술 읽히는 서사의 재미로 그려냈다. 류보선 교수는 "'변경'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현재의 한국 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이곳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씨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지정학적으로 '변경 체제'는 해체됐다"며 오늘의 시대를 '변경'론으로 보진 않는다.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20세기 서로마제국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에 옛 소련 제국과는 다르다. 신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렸듯이, 중국이 말썽을 부리는 북한을 제거하려고 우리와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