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그림도 입체물도 '드로잉'입니다

"드로잉(drawing)은 정신의 도표이다. 정신의 망막을 향해 뒤로, 공간을 향해 앞으로, 여러 방향에서 볼 수 있는 렌즈이다." 영국 조각가 앤서니 곰리는 드로잉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흔히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나 스케치로 여겨지는 드로잉이 실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정수라는 얘기다.

최근 국내에서 드로잉이 재주목받고 있다. 드로잉전이 늘고, 미술 시장에서도 완성품에 비해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드로잉을 찾는 컬렉터들이 많아졌다.

◇철사·CD… 연필의 영역 넘은 드로잉

29일부터 문화역서울(옛 서울역사) 284에서 열리는 '2014 아시아프'는 올해 처음으로 드로잉 섹션을 연다. 아시아프는 대학생 작가들이 참여해 작품을 판매하는 아트페어다. 올 참여 작가는 모두 드로잉 작품을 제출하고, 이 작품들이 '드로잉 특별전-New Drawing' 섹션에서 10만원에 판매된다. 전시에선 백남준, 박수근, 한묵 등 기성 작가 26명의 드로잉 작품도 출품된다. 김태호 2014 아시아프 총감독은 "개념 미술 등 다양한 장르로 미술이 확장되면서 드로잉 자체가 곧 결과물이요, 작품이 됐다"며 "입체 드로잉, 개념 드로잉 등 확장되는 드로잉의 가능성을 청년 작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시아프에서 규정하는 드로잉은 광의(廣義)의 드로잉이다.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콘셉트 드로잉 ▲작품 완성 전까지 과정으로서의 드로잉 ▲모형으로 만든 소형 입체 작품 등을 포함한다. 전시에는 CD 디스크로 만든 백남준의 드로잉 작품, 철사를 구부려 만든 백기은의 '철사 드로잉' 등이 나온다.

◇그림의 기본으로 돌아가자

드로잉을 주목하는 기저엔 '그림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자성이 깔려 있다. 18일부터 김범중, 유재연, 배성희 작가의 드로잉전 '더 드로잉 룸'을 여는 갤러리조선은 "'그린다'는 미술의 본질적 가치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그사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였던 드로잉을 독자적인 미술의 한 장르로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지난 2월 학고재갤러리에서 소묘전을 열었던 중견 작가 강요배는 "드로잉이란 그 작가의 바탕"이라며 "요즘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없어졌다. 카메라를 중간에 개입시켜 사물을 찍고 그걸 그저 옮긴다.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홍익대 미대 최인선 교수는 "과거엔 주전자를 그린다면 실제 주전자를 보며 손 그림을 그렸는데, 요즘 학생들은 인터넷으로 주전자를 검색해서 나오는 주전자 이미지를 보고 다시 그린다"며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드로잉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때마침 작가의 드로잉을 다룬 서적도 잇따라 출간됐다. 드로잉을 중요한 작업 과정으로 여겼던 작가 박이소(1957 ~2004)의 드로잉 161점을 모아 만든 책 '설치를 위한 드로잉'(사무소), 역사화가 서용선의 드로잉을 조명한 '기억하는 드로잉: 서용선 1968-1982'(서울대 김형숙 교수 지음, 교육과학사) 등이다.

미술 시장에서도 드로잉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높아가고 있다. 9월 작가 강민영의 드로잉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갤러리구 구나윤 대표는 "해외에선 이미 드로잉이 하나의 장르로 굳어져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컬렉터 문화가 성숙하면서 드로잉의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는 "원래 드로잉은 가격이 싸서 미술 시장에 입문할 때 가볍게 시작하는 장르로 인식됐지만 최근 선호도가 상승하면서 가격도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