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귀농귀촌협의회의 온라인모임에 눈에 띄는 예명이 있다. 이름하여 ‘스티븐갑수’. 많은 예명 중에 왜 하필 이 예명을 쓰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를 만났다.
만나자던 비닐하우스 안에는 그가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던 중 어디선가 외치는 믿음직한 굵은 목소리. “여기요 여기!” 아! 스티븐갑수, 그였다.
마음 속 생각이 기회가 되다
서른여덟의 정갑수씨는 한 눈에도 매우 바빠 보였다. 비닐하우스 네 동을 혼자 힘으로만 일군다니, 쉴 틈조차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한없이 자신의 것을 내보여준다는 그는 귀농인이 아닌, 이미 체질적인 농사꾼이었다.
그는 3년 전, 전주에서 완주로 귀농했다. 도시의 여느 직장인들처럼 숨막히는 출퇴근길을 반복하던 날들 틈에서 문득 옆과 뒤를 돌아보니 정신이 멍해졌단다. 나이는 점점 차고, 계속 위로만 올라가고 싶은 욕심은 끝이 없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틈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얼마나 행복을 느낄까 싶었다. 뭔가 삶을 돌아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언론매체에서는 귀농귀촌과 관련된 각종 홍보가 눈에 띄게 나왔다. 누구나 한번쯤은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자연을 벗삼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을 터. 갑수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40대 이하 젊은 층의 농촌 유입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마음속 생각으로만 그치던 것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직접 농촌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 곳 저 곳을 알아보던 중, 귀농귀촌지원정책 뿐만이 아니라 아이의 교육환경도 좋은 완주로 정착하기로 했다. 아들이 세 살 때였다.
맨 땅에 헤딩
모든게 어려웠다. 무지상태에서 찾아간 농촌은 달갑게 받아주지 않았다. 단순히 농사를 짓기만 하면 모두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생각의 발상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생각보다 난관은 너무도 쉽게, 너무도 빨리 다가왔다.
아무런 준비조차 없이 맨 땅에 헤딩하듯 다가간 농촌.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뭐든 해야만 했다. 절망은 일렀다. 낙담한 현실을 알리니, 우선은 가족들이 힘이 되어주었다. 가족의 힘을 발판삼아 든든한 지원 속에 땅을 매입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완주군에서 지원하는 귀농귀촌정책을 알아보고, 이사비와 주택수리비를 지원받아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자본력이 부족하다 보니, 당장의 생계수단이 필요했다. 오전과 저녁시간에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지면서, 오후 시간은 농사를 짓고 배우는데 하루를 다 보냈다. 아르바이트업무는 우편택배집중국의 물품분류작업으로, 뜨거운 태양아래서 농사를 지은 후 고단한 몸을 이끌고 하는 작업이었다. 몸은 고되었지만, 그에겐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 수면시간은 두 세시간이 전부였지만, 그의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는 또 있었다. 외지인을 바라보는 마을주민들의 따가운 시선. 그것은 곧바로 상처로 돌아왔다. 농촌에서 평생을 살아온 주민들에게 준비 없이 허둥대는 갑수씨의 모습은 그저, 아들뻘 되는 젊은 사람의 객기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농사를 제대로 배워야만 했다. 묻고 또 물었다. 최대한 자신을 오픈시켜 배우는 자세로 임하니 주민들은 갑수씨를 마을사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믿음의 힘이었다.
멘토, 나를 일으킨 긍정의 힘
농사를 배우는 데는 멘토들의 힘이 전적으로 컸다. 아무것도 몰라 막연했을 때, 갑수씨는 ‘귀농사모’라는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귀농사모’는 우리나라 귀농인들이 모인 최대의 온라인 모임으로 귀농귀촌에 대한 많은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귀농 초기, 갑수씨는 귀농사모에 의지하면서 오프라인 모임도 자주 나가게 되었다. 모임에서 만난 선배 귀농인들은 당연히 갑수씨에게 더없이 좋은 멘토가 되어주었고, 자연스레 완주군귀농귀촌협의회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저는 귀농귀촌하는데 멘토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으로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농사기술을 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토마토는 이파리만 봐도 그 상태를 알아야 하지요. 하지만 귀농 새내기들은 아무리 봐도 모릅니다. 예방법도 몰라서 농사를 망치기 일쑤지요. 농사를 제대로 알려면 기술부터 온전히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 멘토는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를 갖는데도 꼭 필요합니다. 처음엔 저도 사기를 당해 천만원이라는 큰 돈을 버려야 했지요. 저처럼 귀농 1년차에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상처이기도 하지요. 마지막 세번째는 선배 귀농인들은 날씨만 봐도 하루하루의 농사일을 판가름할 수 있으니, 귀농 새내기들은 선배들에게 꼭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농사에는 자연의 영향, 특히 바람의 기운이 중요하니까요.“
꼬박 8개월, 멘토들에게 혹독하게 배우며 갑수씨는 점점 농부가 되어갔다.
시련은 다시 희망을 갖게 한다
안간힘을 다해 농부가 되어가던 어느 날, 갑수씨 인생의 최대 위기가 닥쳤다. 2012년, 전국을 무너뜨린 태풍 볼라벤. 그 위력에 눌린 전국의 논과 밭은 그대로 쓰러질 수 밖에 없었고, 시련은 갑수씨도 비켜갈 수 없었다. 두동의 하우스가 모두 무너졌고, 매출은 당연히 제로였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시련은 한순간에 들이닥쳤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탐스럽게 익어가던 토마토는 하루아침에 바닥 한편으로 나뒹굴고 빈 가지만 앙상히 남은 하우스를 보니, 갑수씨는 자연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도 몰려왔단다. 볼라벤의 위력은 생각보다 상당했다.
그 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눈물부터 난다는 갑수씨. “자연재해로 농사에 피해를 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귀농한다고 하면 누구나 장점만 말해주지, 단점을 말해주진 않거든요. 그래서 지금 귀농하려는 후배들 보면 참 안타까워요. 후배들을 보면 다들 돈만 들여서 농사를 배우고 있는데 무엇보다 산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협의회도 가입해 긴밀한 소통창구가 필요한 것이고, 부딪치고 실패하는 많은 경험과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야 하지요. 하지만 아직 그런 것은 뒷전인 귀농귀촌자들도 많습니다.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지요.”
갑수씨는 뭐든 심으면, 성공할 줄 알았단다. 그러나 거대한 시련 후, 그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고 자부한다. “처음엔 오기였지요. 선배들의 조언을 그냥 흘려들었어요. 하지만 제가 자만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농사’하면 누구나 할 수 있겠거니 하고, 어설프게 다가가면 큰 코 다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지요.”
긍정의 힘, 귀농귀촌협의회와 함께
시련을 겪은 갑수씨는 완주군의 봉동읍귀농귀촌협의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더욱 단단해졌다. 협의회는 갑수씨에게 단순한 소통의 창구가 아닌, 희망의 끈이었다. 올해는 봉동읍협의회의 회장직도 도맡아 완주군 귀농귀촌인들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협의회에서는 농사와 관련된 정보만 나누는 게 아니다. 농사 외의 일자리정보, 취미생활, 판로확보 등 생활수단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나누고 교환한다.
갑수씨는 회원들의 단합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볼링동아리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의 삶에 생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향후에는 봉동읍협의회 회원들만의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온라인을 통해 회원들이 수확한 작물을 판매할 수 있는 판로를 확보 중이다.
갑수씨는 농촌에서 희망을 보았고, 잃었던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꿈이 있어 농촌에 왔고, 농촌에서 꿈을 실현하니 희망을 새겼으며, 희망을 품으니 마음의 평안 또한 뒤따라왔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갑수씨가 그토록 애타게 찾은 행복이 아닐까.
앞으로 갑수씨는 유기농농사법을 이용한 딸기농사에 매진할 계획이다. 남들과 똑같은 보편화된 틀에서 벗어나 생각의 범위를 넓힌 자신만의 농사를 짓는 게 꿈인 갑수씨.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어 가야죠. 내가 선택해서 왔으니까요.” 그의 말대로 갑수씨 삶의 주인공은 스티븐 갑수 그이니, 주인공이 된 삶은 이미 성공했다는 평을 해도 과언이 아닐터다.
스티븐갑수가 전하는 귀농 tip
뭐든지 직접 다녀봐야 합니다. 주말농장을 이용해서라도 직접 경험하는 게 필요하지요. 귀농을 생각한다면 최초 2년은 준비기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바로 현장에 부딪쳐서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귀농을 한다고 처음부터 돈을 버는 건 아닙니다. 대범하다고만 다 되는 게 아닌 거죠. 또 어떤 작물을 재배하는지에 따라서도 농사법이나, 농사기술이 달라집니다. 완주군으로 오려고 생각한다면, ‘두레농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좋습니다.
또 맨 손으로 와서 금방 수확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땅만 있다고 수확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값, 비료값 등 기타 경비를 먼저 고민해야 하고, 어린 자녀들과 귀농할 경우에는 교육과 관련된 주변환경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하고 기다리는 동안 큰 인내심을 배우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을 것이며,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귀농 전에 생각했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잠깐!… 두레농장이란?
두레농장은 완주군내 농촌마을의 어르신들에게 적정한 노동기회와 공동식사, 일정한 소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마을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완주군의 로컬푸드와 건강밥상꾸러미 사업을 통해 제값을 받고 판매되고 있다. 더불어 도시 아이들이 찾아와 체험학습을 하는 공간, 귀농자가 어르신들에게 농사에 관련한 여러 가지 노하우와 기술을 배워보는 소통의 공간으로도 활용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자료제공·전라북도 귀농귀촌 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