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막장과의 해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짚어간다. 충주 수안보에서 집이 있는 서울로 가기 위해 점심 먹고 바로 나선 길. 올 때와 마찬가지로 산길을 돌아내려 가는 내내 차라곤 내 차 한 대밖에 없다. 사실 산길이라 해 보아야 요즘은 어딜 가도 길이 뻥뻥 뚫려있으니 큰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산길이 한가하기 이를 데 없다. 서울에 사는 내가 이런 한적한 길을 언제 만나려나 싶어 천천히 달리며 풍경 속에 빠져든다.

산길 양옆의 숲은 어느새 짙푸른 녹음이다. 연둣빛은 짙푸른 녹음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봄인가 싶었는데 숲은 어느덧 여름을 말하고 있다. 고개를 넘어서니 길 한쪽이 붉다. 산딸기가 붉게 영글어 가고 있다. 차에서 내려 습관처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한 알을 따서 입에 넣는다. 달콤하다. 어제 숲에서 따 먹은 오디 맛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시 산딸기의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참 올해는 복도 터졌다고 생각한다.

곱다. 하다 못 해 벌레 먹은 잎사귀 하나까지도 곱다. 숲에서 미운 구석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여름 숲에 빠져들다가 오늘이 용문 장날임을 깨닫는다. 언젠가는 장날을 한 번 가 보았으면 했었다. 사실 수안보에서 머무는 동안 간 김에 장에도 들러 옛 정취에 빠져보고 싶었는데 놓치고 말았다. 그때 눈에 띄었던 용문 장날이 오일 십일 장이었다. 오늘이 이십 일이니 용문 장날이다.

고속도로를 향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용문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 도움을 받았지만 용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쳐 양평을 거쳐서 용문으로 갔다. 생각대로 용문 장날이다. 예전 어렸을 때 방학 때면 늘 용문 외가에 갔다. 외할아버지는 장날이면 우리 형제들을 앞세우고 장터엘 갔다. 먼지 뽀얗게 이는 신작로 길을 걸어 성당 밑을 지나 장터에 도착했다. 볼 것도 먹을 것도 많은 장터에서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하다 국밥 한 그릇을 먹고는 뻥튀기나 개구리참외를 사 들고 돌아오곤 했다.

그 장터엔 오늘도 그 옛날처럼 사람들로 북적인다. 두 손으로 들기도 벅찬 수박이 보이고 샛노란 참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눈길을 돌려놓는 곳이 있다. 모자를 파는 곳이다. 며칠 전 동대문 시장에서 산 모자가 보인다. 궁금했다. 얼마나 할까? 사지도 않을 거면서 궁금한 김에 물어본다. 만 이천 원이란다. ‘뭐? 뭐라고?’ 무슨 이런 일이 있는가. 난 분명 만 오천 원 주고 샀는데 시골 장터에서 만 이천 원이라니…. 물건이 다르겠지 싶어 이리저리 살펴본다. 분명 새로 나온 디자인 맞다. 모자에 둘러쳐진 장식이며 상표며 같은 거다. 나 참 ‘세상이 이런 것이’ 도 아니고 서울에서 더 비싸게 사다니 배신감이 든다. 얼른 발길을 돌린다. 더 서 있어봐야 마음만 쓰리다.

오이며 열무 파는 곳을 지나니 된장이며 고추장 파는 곳이다. 그런데 장 색깔이 뭔가 다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장을 들고 살펴본다. 된장도 아니고 고추장도 아니고…. 그렇다면 이 건 막장이다. 막장! 얼마 만인가. 막장을 먹어 본 지 이십 년도 넘었다. 내 고향 강릉 쪽에서만 담가 먹는 장이다. 간장을 빼지 않은 메주에 보리밥을 지어 고추씨 빻은 것을 넣어 버무려 익혀 먹는 장이다.

내 눈이 점점 커짐을 느꼈는지 장을 파는 아저씨가 자기는 평창 사람이고 자기네가 직접 만든 막장이라고 자랑이 늘어진다. 아저씨 권유에 따라 주걱에 퍼주는 막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본다.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이 게 무슨 횡재인가 싶다. 이만 원을 주고 사다가 고추장이 눈에 들어온다. 보리고추장이다. 예전에 어머니가 해 주시던 그때 그 고추장 맛이다. 찹쌀로 담근 고추장도 있었지만, 보리고추장 한 통도 사 들었다.

장터를 빠져나오면서 행복감에 발걸음도 가볍다. 이런 행운을 또 어디서 맛본다는 말인가. 마음이야 늘 ‘장은 담가 먹어야 하는데….’ 하지만 주변 여건이 그리 쉽지 않다. 아파트에 살면서 장을 담근다는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베란다에 담아서 내놓아도 시골처럼 제대로 숙성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만 있고 실천이 되지 않는다. 늘 사 먹는 장들이 찝찝하지만, 세월 따라 살아야 한다고 그 찝찝함을 눌렀다.

오늘 저녁엔 참으로 오랜만에 구수한 막장 찌개를 끓여야겠다. 멸치 좀 넣고 감자도 숭숭 썰어 넣고, 호박을 듬뿍듬뿍 넣어 끓이다가 마지막엔 두부와 옥상에서 딴 푸른 고추도 넣어야지. 벌써 막장 찌개의 구수함이 코끝에 맴돈다. 한동안은 이 막장 덕분에 식탁에 앉을 때마다 ‘그래 이 맛이야!’ 할 것이다. 아~ 며느리에게도 나누어 주어야지 ‘바로 이 맛이 막장 맛이란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