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땅·바다 떠돌던 심청은 나의 이데아"

"심청이는 영원한 처녀야. 용궁에 가서 용왕과의 로맨스도 있었겠고, 육지로 올라와 황후가 되지만 그래도 처녀성을 잃지는 않았을 거야. 숱하게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가해를 당해도 굴복하지 않고 항구적 순결을 지키는 존재, 그게 나의 '이데아'야."

고은(81) 시인은 요즘 심청과의 '플라토닉 러브'를 즐기고 있다. 고전 소설 '심청전'을 바탕으로 한 장시(長詩) '처녀'를 쓰면서 더위를 잊고 있다. 경기도 안성에서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한 지 1년이 다 된 시인을 찾아갔더니 책상엔 '처녀'의 초고 더미가 수북했다. 크기가 제각각인 백지에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간 초고였다. '처녀'는 200자 원고지 1500장 분량으로 완성할 예정이란다.

"잘 안 돼, 올여름에 초고를 완성해서 가을엔 최종 원고를 민음사에 넘겨주기로 했는데…"라며 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명이 나면 하룻밤에 시 10편도 써내는 시인이지만 모처럼 시도하는 서사시 앞에선 애를 먹는다고 한다.

고전 소설 '심청전'의 심청은 천상에서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산 탓에 사람의 몸을 거쳐 지상에 내려온 선녀였다. 고은은 여기에 착안해 심청이 하늘에서 육지로 왔다가 바다에 뛰어들지만, 다시 육지를 거쳐 하늘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를 새롭게 상상했다. "심청을 통해 삶의 순환을 그리는 거지. 천상은 전생(前生) 같은 거야. 하늘과 땅과 수중 세계를 두루 찾아가는 정신의 순례기야. 유교와 불교, 도교를 다 다루지. 단테가 '신곡'에서 천국과 연옥, 지옥을 두루 그린 것과 같은 구성이지. 지난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머물면서 '처녀'를 구상했어."

고은은 1991년 소년이 엄마를 찾아 세상을 떠돌다 깨달음을 얻는 소설 '화엄경'을 낸 적이 있다. 이 소설은 스웨덴에서 번역돼 호평을 받았다. 심청을 내세운 장시 '처녀'가 바로 그 소설의 짝패가 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장시 '처녀'의 탈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해외에서 거듭 날아오는 초청장이라고 한다. 시인은 8월과 10월엔 마케도니아와 이탈리아에 국제 시인상을 받으러 간다. 10월엔 미국 시카고에서 미국 포에트리파운데이션 주최로 시 낭송과 강연을 하고, 귀국길엔 하와이에서 열리는 '고은 포럼'에 들른다. 11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릴 국제시인축제에도 초청됐다. 한국 시인 중 이처럼 해외에서 숱하게 찾는 이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고은 시인 혼자뿐이다. 그러나 그는 노벨문학상의 '노'자도 꺼내길 싫어했다.

문단과 출판계에선 고은 시인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최근 더 낮아졌다고 보기도 한다. 2011년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가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상자 명단을 볼 때 10년 이내에 시인에게 또 상이 돌아가기 쉽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2012년 중국 소설가 모옌이 수상해 아시아 문학이 당분간 밀려날 것이란 분석도 있다.

그러나 고은 시인은 여전히 왕성하게 쓰면서 국제적 지명도를 더 높이고 있다. 지난해엔 시 607편을 묶어 1000쪽이 넘는 시집 '무제시편(無題詩篇)'을 냈다. 지난 5월과 6월 런던과 베를린에서 열린 시 낭송회에도 참가하고 돌아와 꾸준히 '처녀'를 쓰고 있다. 게다가 올해 하반기는 해외에서 문학상을 받거나 강연과 낭송을 하면서 보낸다.

고은 시인은 팔순이 넘었지만 건강하기로 이름이 높다. 그는 "술에 관한 한 나는 전방위적(全方位的) 허영에 미쳐 있다"며 여전히 주종(酒種)을 가리지 않는다. 그와 대작(對酌)해보고 놀란 후배 문인이 여럿이다. 몇몇 젊은 시인이 따로 모여 "고은보다 오래 살자"는 건배사로 결의를 다진 적도 있다. 고은 시인은 "건강 비결? 그런 거 따로 없고, 아침은 소식(小食)이지만 세끼 다 먹는다"며 "나는 10년 혹은 그 이상 더 글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