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명이 쓸 깨끗한 물, 더 멋진 유산 있을까요

2년 전 경기도 오산에 사는 박주원(여·72)씨의 칠순을 맞아 가족이 모였다. 마흔을 넘은 세 딸이 300만원씩 모아 "아버지와 여행 한번 다녀오시라"며 900만원을 내놓았다. 박씨는 젊을 때 서울에서 화장품 외판원을 하며 가족 생계를 돌봤고, 30년 전부터는 남편과 오산에 자리 잡아 세탁소와 부동산 일을 거들었다. 박씨는 딸들에게 "고맙다. 그런데 나를 위해 쓰는 것보단 남 돕는 일에 쓸 테니 그리 알라"고 했다. 박씨는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에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이 마실 우물을 파는 일에 써달라"며 100만원을 얹어 1000만원을 내놨다. 남편 변광표(72)씨는 "아내의 칠십 인생에 처음 있던, 갑작스러운 기부였다"고 했다. 이 돈으로 아프리카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의 한 마을에 깨끗한 물을 쏟아내는 우물이 생겼다.

박씨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어린아이들이 흙탕물 마시는 모습을 봤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 먼저 간 큰딸이 생각났어요. 화면 속 외국 아이들도 내 새끼 같지 뭐예요." 맏딸은 10년 전 폐암 3기 선고를 받았다. 반년을 투병하다가 초등학생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딸을 보낸 뒤, 내가 생활에 얽매여 어미 본분을 잊고 딸을 먼저 보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이렇게 빈손으로 가면 안 되겠구나. 딸을 대신해 다른 이들을 보살피는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씨는 작년에 700만원을 새로 기부했고, 우간다 주민 2300명이 새 우물 혜택을 봤다.

경기 하남에 사는 장형권(37)씨는 작년 3월 아버지를 하늘로 보냈다. 예순 넘도록 평생 택시를 몰던 아버지는 담낭절제수술을 받은 뒤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보험금 1000만원을 남겼다. 주말이면 지방으로 봉사를 떠났던 아버지는 평소 "처음과 끝은 신이 주시는 거니까 삶은 좋은 일, 봉사하는 데 쓰자"고 했다. 장씨는 "아버지가 남긴 돈을 기왕이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곳에 쓰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가족도 동의했다. 장씨는 아프리카 우물 사업이 떠올라 바로 기부했다. '장수동'이라는 아버지 이름 석 자가 쓰인 우물이 아프리카 가나의 마을에 생겼다. 장씨 어머니 한옥이(63)씨는 "400명 주민이 남편이 남긴 우물로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다니 이보다 뜻깊은 유산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가나 주민들은 깨끗한 물이 부족해 장티푸스·콜레라·이질 등 수인성(水因性) 질병으로 고통받아왔다.

박씨와 장씨 모두 사진 한 장을 지니고 있다. 우물에 목을 축이는 어린이들 모습이다. 장씨는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우물에서 웃는 이름 모를 아이들 사진을 보게 된다"고 했다. 박씨는 지난달 20년 넘게 모은 적금 3000만원을 또 내놓았다. 아프리카 가나와 우간다에 새 우물 3개가 더 만들어진다.

아프리카에서 우물을 파려면 우리 돈 1000만원가량 든다. 현지의 기아대책 봉사단원과 주민, 기술자가 3개월간 작업한다. 기아대책 서주형 간사는 "작년에 아프리카에 전년보다 6개 많은 35개의 새 우물을 팠고 올해도 현재까지 26개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