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 집에 오자마자 몸져눕는다. 너무 많은 말을 쏟아냈다. 면 대 면으로 혹은 전화로, 고개 조아리거나 때론 삿대질하며 공격적으로 다투었다. 사람을 만나러 술자리로 향할 때마다 야광의 휘황찬란함은 얼마나 메스꺼웠나. 새벽녘이 돼 비로소 혼자다. 인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하철도 999'를 탄 철이를 생각한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정거장엔 별빛이 쏟아질 것이다. 강원도 횡성에 있다는 천문인마을을 떠올린 건 그때였다.
◇눈·귀의 고요를 찾아
강변터미널에서 버스를 잡아탄다. 이어폰을 끼고 아무것도 틀지 않는다. 2시간 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에 닿는다. 터미널은 따로 없고, 그냥 면사무소 앞 간이 정류장이다. 택시를 잡아탄다. 8㎞쯤 더 가면 치악산과 백덕산 사이에 자리한 강림면 천문인마을이다. 잘 가던 택시가 갑자기 기어를 1단으로 바꾸더니, 거북이 운전을 한다. 덕사재 구간이다. 택시 기사가 "겨울에 눈 오면 아예 올라오지도 못하는 길"이라 한다. 10분 뒤, 전혀 다른 해발고도가 펼쳐진다. 분지(盆地)라 높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안흥면보다 250m가 더 높다. 천문인마을은 1997년 들어선 건평 120평짜리 3층 건물이다. 체험 학습을 위해 단체로 찾는 중·고등학생뿐 아니라, 아마추어 천문인들의 성지다. 이곳을 지키는 정병호 천문대장이 딱 한마디 한다. "어둡고 조용하니까요."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강의실이 있다. 50~60명 들어갈 수 있는 소규모 강당이다. 지하 휴게실은 원목으로 꾸며진 '베이스캠프'다. 습기가 많은 날엔 난로에서 장작이 탄다. 책장에 법정의 '말과 침묵'이 꽂혀 있다. "침묵의 체로 거르지 않은 말은 사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다." 휴대전화를 끈다. 2층으로 올라간다. 11인치 반사망원경 한 대가 서 있다. 렌즈에 눈을 갖다 대면, 외계가 육안에 와 닿는다. 별은 아직 구름 너머에 있다.
밤이 되자 천문인마을 꼭대기에 ‘별바라기’들이 떴다. 뒤로 펼쳐진 하늘은 천문인마을 정병호 천문대장이 찍어둔 별의 일주 운동 사진과 합성한 것이다. 카메라를 삼각대로 한 방향에 고정해 놓고, 장시간(1~12시간 정도) 노출하면 별들의 궤적이 사진에 드러난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어두워지는 시간
외부 철제 계단을 타고 한 층 위로 올라가니 350㎜ 천체망원경이 있는 지름 3m짜리 천체 돔이 있다. 벽면 버튼을 누르면 지붕이 열린다. 어두워지길 기다린다. 오후 8시쯤이면 이 일대는 대체로 그늘에 가까워진다. 1999년 국내 유일의 별빛 보호 지구로 지정된 곳이다. 잘 보이는 날엔 수억 광년 너머의 외부 은하도 볼 수 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몸이 어두워지는 사이, 암적응(暗適應)된 동공이 홍채에 꽉 들어찬다. 귀가 밝아진다. 처음엔 풀벌레 우는 소리밖엔 안 들리더니, 점차 옥수수밭 이파리가 서걱대는 소리, 먼 산에서 성대 없는 고라니가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장의 비밀스러운 요동까지 고스란히 바깥 공기를 흔든다. 별 보는 데 망원경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건 비상식량. 안흥에서 상자째 사 온 찐빵을 꺼낸다.
안흥면에만 '안흥찐빵' 가게가 17곳 있다. 마을 곳곳 원조(元祖)를 주장하는 간판이 부산한데, 심지어 '시조(始祖)'도 있다. 찐빵만 말이 없다.
1986년부터 찐빵을 쪄 최고령이라는 '면사무소 앞 안흥찐빵'에 들른다. 갓 쪄낸 빵이 담요를 덮고 조용히 식어가는 풍경은 권태로웠다. 이곳의 비밀은 시간. 밀가루 반죽을 온돌방 위에 방치해두는 것이다. 1시간 정도 저 홀로 부풀어오른 덩어리에 달콤한 술 냄새가 밴다. 안흥산(産) 팥소가 달지 않아 계속 베어 물게 된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된다.
◇별 헤는 밤의 별별 생각
오후 9시, 온전히 밤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은 캄캄한 정적이 온다. 낚시꾼처럼 천문대 꼭대기에 계속 앉아 별을 기다린다. 1년에 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120일 정도라니, 쉬운 일은 아닌 셈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바람의 결을 따라 달라지는 천체의 무늬를 바라본다. 그러다 반짝, 구름 사이로 견우성과 직녀성이 눈짓한다. 그곳을 향해 별지시기(레이저빔)를 쏜다. 종이에 형광펜을 긋듯 선명한 삼각형 하나가 만들어진다. 여름철 별자리다. 독수리자리의 견우성과 거문고자리의 직녀성, 그리고 백조자리의 데네브를 연결하면 여름의 대삼각형이 완성된다. 수십, 수천 광년 전의 빛이다. 이미 과거의 빛이므로, 별 보는 일은 필연적으로 먼 옛날 일을 응시하는 작업이 된다.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을 모두 쏟아부었던 윤동주를 이해하게 된다. 자정이 되자 사위가 완전히 잦아든다. 구름 너머에 은하수가 걸쳐 있다. 여행을 떠났으나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 철이를 생각한다.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이다 나오니 오전 5시 20분. 운무를 뚫고 가장 뜨거운 별 하나가 떠오른다.
천문인마을 여름철 당일 코스는 오후 8~10시 별자리 강의와 별 관측으로 구성된다. 숙박 코스의 경우 단체 방문객 40명까지 수용 가능하지만 방이 총 4개인 터라 숙박을 원하는 가족 단위 손님은 4가족으로 한정된다. 전화·인터넷 예약 필수. 숙박하면 저녁·아침 ‘집밥’이 제공된다. 학생 7만원, 성인 7만5000원. 당일 코스는 2만원. 문의 (033)342-8813 홈페이지 www.astrovil.co.kr
안흥찐빵 안흥면에만 찐빵 가게가 17곳이지만 가장 오래된 건 ‘면사무소 앞 안흥찐빵’(033-342-4570)이다. 찐빵 1개당 500원이고, 1박스(20개)에 1만원. 빵은 당일 판매할 양만 빚기 때문에 예약 전화를 하는 게 좋다.
대중교통 서울 강변터미널에서 총 3대의 안흥행 버스가 출발한다. 천문인마을은 안흥면에서 택시로 10분 거리지만 안흥면 택시는 딱 3대라 전화번호를 알아두는 게 편하다. (033)342-4136, (033)342-4017, (033)342-4027
기타 천문대 서울에서도 별 볼 수 있다. 시립서울천문대에 가면 18m 돔스크린과 600㎜ 대형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의 낭만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문의 (02)2204-3190. 해발 800m에 자리한 강원도 영월의 별마로천문대. 봉래산 정상의 활공장에서 호연지기를 키울 수도 있겠다. 100% 인터넷 예약제다. www.yao.or.kr. 바다 건너 제주에도 별은 빛난다. 서귀포 천문과학문화관은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별 ‘노인성(canopus)’ 관측에 최적이라고 한다. 문의 (064)739-9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