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콩나물은 자란다

대학생 아들만이 아니다. 드디어 나도 방학을 맞았다. 3월부터 6월까지 올 상반기 동안 어쩌면 아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했는지도 모른다. 대학생이야 매일 수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 때론 토요일까지 적어도 하루 2시간, 어느 날은 5시간 강의를 들으러 다녔으니 말이다.
 
시간표의 중심은 인문학 강좌들로 ‘시가 있는 미술 산책’, ‘인물에 담긴 중국사’, ‘문학으로 읽는 그림 이야기’, 독서 관련 전문 강사가 진행하는 독서회 등이었다. 여기에 노후설계와 같은 실용강좌, 매번 주제와 강사를 달리해 열리는 특강들,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라인댄스까지 곁들여졌다.
 
어느 강좌에서나 사람이 꽉 찬데 놀라고, 참가비에 또 놀라게 된다. 수백만 원에 달하는 아들의 등록금액에서 0을 두 개는 없앤 정도에 불과해서다. 도서관, 박물관, 생활체육회 등 시, 도 공공기관에서 평생교육으로 시행되는 강좌여서 거의 무료이거나 많아야 5만 원 미만인 게 보통이었다.
 
그렇다고 품질이 떨어지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강사부터가 전직 교사나 대학교수, 현직 대학원 주임교수에 이르기까지 해당 분야는 물론이고 교수법에서도 전문가들이었다. 공공기관의 강사료는 박하기 짝이 없다는데 경력을 살린 재능기부 차원의 사명감이 아니라면 맡기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학생들은 또 얼마나 각양각색인지. 간혹 젊은 주부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강사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 이상 은퇴한 노년들인데 그 몸담았던 분야나 깊이는 실로 다양하다. 더러는 전문가적 식견이 엿보이는 학생도 있으니 강사의 수업준비가 허술할 수 없다. 개강에 앞서 한 학기 강의 계획서를 공표하고, 프린트물 교재도 준비해서 나눠줘야 한다.

수업시간 중 불쑥 던지는 학생들의 질문에도 언제든 열려있어야 한다. 스스로 원해서 참석하는 강좌인지라 학생들의 학습 열기가 대단한 까닭이다. 그러나 강사에 대한 존대는 깍듯해서 차 한 잔이라도 슬며시 강사용 탁자에 갖다 놓는 모습들이었다.
 
들으면 바로 새나가 ‘정말 신청하길 잘했다’ 싶지 않은 강좌가 지난 학기 동안 하나도 없어서 피치 못 할 경우가 아니고는 결석하기가 아까웠다.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앉아서 졸든지, 수업의 반 토막이 끝난 후 나타나든지 또는 사라지든지 간에 대다수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조차 결석하는 법이 없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출석이라도 잘해야 머리에 남는 게 있을 것 같아서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배운 내용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수업 중 방금 들은 설명조차 받아 적으려는 순간 가물거리기 일쑤니 이를 어쩌랴. 이미 공부했다는 내용에 대해 강사가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이런 물음표만 솟는 것이었다. ‘언제 그런 걸 배웠던고?’
 
다들 마찬가진가 보았다. 수업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내려가면서 한 여자 어르신이 나를 보며 한탄을 했다. “댁은 아직 젊어 뵈니 그래도 나을 거유. 나야 들으면 바로 새나가니, 원….” 함께 탄 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말씀을요. 저도 똑같답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어요.”
 
대체 뭘 믿는다는 거냐, 얼른 답을 대라는 레이저 눈빛들이 쏟아졌다. “붓는 족족 물이 다 빠지는 콩나물시루처럼 배우는 족족 다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시루에서 콩나물은 자란다는 것이죠.” 적으나마 위안이 됐는지 다들 흐뭇한 미소를 나누며 엘리베이터를 나와 헤어졌다.
 
그만하면 참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었다. 우선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공부와 벗할 수 있는 것일 게다. 2시간 강의를 내쳐 들을 수 있을 만큼 신체며 정신이 건재한 것이야말로 또 얼마나 큰 축복인가.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만큼 노년이 아름다워 보이는 때도 없는 듯하다.
 
일전 ‘논어’ 공개강의에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신정근 교수가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얘기를 전했다. 대구에 사는 알파벳도 모르는 할머니가 혼자 영어공부를 해서 런던 올림픽 때 영국까지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 대화도 했다고 한다. 리포터가 할머니 집에 가보니 벽에는 온통 영어 단어와 문장이 가득했는데 경상도식 영어발음을 한글로 적어놨더란다.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
 
배움에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을 실감 나게 한 할머니다. 고령화 추세로 인해선지 요즘 어떤 강좌이건 참석자들 가운데 노년층은 단연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고학력화 또한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지적 갈증을 해소하려는 최고 학력의 노인들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에는 60세 이상 연령층 중 전문대 졸업 이상 학력자가 10만 7725명, 비율로는 3.24%였으나 2010년에는 78만 3546명, 10.3%로 대폭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한편 그 능력을 활용할 방안이 절실한 시점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는 마당이기도 하다.
 
사실 마음만 있다면 배울 것과 배울 곳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내 경우, 이동시간을 아끼고자 지역 내 배움터만 주로 활용했는데도 대학생 못지않은 수업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동 거리를 마다치 않는다면 각 대학을 비롯해 열린 강좌를 운영하는 곳들은 부지기수다.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 강좌도 가능하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운영하는 ‘배달강좌제’가 그렇다. 최소 10명 이상으로 팀을 짜서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의 갖가지 배움을 신청하면 방문 교육해주는 시스템이다. 서울시에서도 인문학에 관심 있는 50~65세 서울시민이 학습 소모임을 구성하고 운영계획서를 제출하면 심사를 통해 강사비, 공간대여료 등 비용을 최대 80%, 3개월간 보조해준다고 한다.
 
‘논어’에서는 인간의 네 가지 유형을 말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배워서 아는 사람, 고난 통해서 배우는 사람, 고난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없을진대 인간은 결국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뉘는 게 아닐까. 남송대 유학자 주희는 아예 이렇게 못 박았다.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올해 공부하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세월은 나를 위해서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 앞으로 배움의 물을 또 얼마나 주어 ‘콩나물’을 자라게 할 것인가. 확실한 건 자주 물을 줘야 콩나물이 엉기지 않고 예쁘게 자라 콩에는 없던 비타민C까지 풍성해진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