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세상이 내 작품을 만들었다

1970년 4월 11일 서울 한양대 건너편 살곶이 다리 근처 강둑에 불이 붙었다. 한참 타오르던 불이 꺼지자 강둑엔 지그재그 형태로 거대한 삼각형 8개 흔적이 남았다. 화재 사고가 아니었다. 철저한 각본에 따라 기획된 한국 최초의 대지(大地) 예술 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였다. 불 낸 작가는 예술이라는데 불 보는 대중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했다.

그보다 한 해 전 1969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방송국 분장실에 모델 수십명을 불러 갑자기 그들 몸에 그림을 그렸다. '퍼포먼스'란 단어도 모르던 시절 감행한 퍼포먼스 예술. 사람들은 갸우뚱했다. '보디 페인팅'이란 제목의 이 작업은 43년간 잠자고 있다가 재작년 하루아침에 재주목받았다. 그해 유명 현대미술관인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잭슨 폴록 같은 현대미술 거장을 초대해 연 전시 '어 비거 스플래시(A Bigger Splash)'전에 당시 사진이 전시된 것이다. 그제야 국내 미술관에서 전시 요청이 왔다.

한국 1세대 전위예술가 김구림(78) 화백. 그는 앞서도 너무 앞서간 바람에 평가절하됐었다. 1960~70년대 생경했던 아방가르드 예술을 알려왔고, 이후 판화·조각·무용·영상 등에서 전방위로 활동했다. 1969년 미술·문학·무용계 인사들을 아울러 '제4집단'이란 아방가르드 예술 단체를 조직했다. 한국 최초의 전위 영화 '1/24초의 의미'도 만들었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씨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다장르 탐색형 작가'여서 한 우물을 파 완성도를 높이는 부류의 작가에 비해 평가를 제대로 못 받은 인물"이라 말한다. 김 화백의 회고전이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8월 24일까지)과 천안(10월 5일까지)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60여년간의 작품 200여점이 전시됐다.

"평생 '미친놈'이란 소리를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어요. 오죽하면 '김구림은 정상인가'라는 제목으로 주간지에 기사가 나왔을까." 최근 소격동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에서 만난 김 화백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대구의 한의사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란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미대에 들어갔지만 바로 자퇴해버렸다. 대신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라이프지, 타임지 같은 잡지를 보며 새로운 예술을 접했다. "미국에선 글쎄 바닥에 줄줄 뭔가를 흘려 놓고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 하고, 아트라는 거예요. 한국에선 빵떡모자 쓰고 이젤 앞에 앉아 폼 잡아야 화가인 줄 아는 시절이었는데…."

그렇게 배운 실험 예술을 거듭하며 이름을 알렸지만 우리 미술계의 뿌리 깊은 학연을 극복하진 못했다. 1985년 타성에 젖은 우리 미술계에 신물을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15년간 활동했다. 이후 2000년 옛 문예진흥원(아르코)에서 귀국전을 열며 다시 국내 화단으로 복귀했다.

장르도, 주제도 매우 다양해 김 화백에겐 늘 정체성 의문이 제기된다. "내가 변하려고 해서 변한 게 아니라 세상이 내 작품을 변하게 한 겁니다. 세상이 변하는데 평생 점만 그리는 것. 그게 예술입니까?" 김 화백이 핏대를 세웠다. "남들은 모터보트 타고 한강 즐기는데, 거기서 도포 입고 낚시질하면 세상 사람들이 도 닦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현실을 망각한 거지." 거침없는 독설이었다.

아직 녹슬지 않은 그의 안테나가 근래 포착한 주제는 성형이다. 한 중년 여가수가 나온 TV 프로그램을 봤는데, 방송에서 흘러나온 이 가수의 과거 화면 자료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냥 다른 인간인기라, 다른 인간! 게다가 강남 카페에 앉아 보니 무슨 예쁜 마네킹 찍어내는 공장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뉴욕에 살 때 아는 의사가 집도하는 쌍꺼풀 수술을 지켜본 적도 있다는 그는 "왜 이렇게까지 뜯어고쳐야 하는지, 대체 뭐가 아름다움인지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서울전에는 도덕경 같은 고서에 성형한 여인의 모습을 기괴하게 콜라주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내일모레 여든을 바라보면서도 늘 젊은 감수성을 연마한다는 그가 작정한 듯 이 시대 젊은 작가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시대에는 팔리는 거 신경 안 썼어요. 젊었을 땐 실험해야 해요. 돈, 이런 거 상관 말고!" 요즘도 '세상 배우려' 매일 아침 신문 6개를 정독한다는 노(老) 작가의 일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