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건망증이겠지!

벌써 사흘째다. 내가 푸른빛의 후드 잠바를 찾기 시작하는 게. 안방 장롱도 열어 보고 옷 방도 열어 보고 심지어 딸 방으로 쳐들어가 딸 장롱에 있는 옷까지 다 꺼내서 탈탈 털어보고, 그래도 보이지 않는다.

올봄에 시장에 갔다가 허름한 노인들 옷만 주로 파는 곳에서 이 하늘빛 후드 잠바를 발견했다. 그리 흔하지도 않은 디자인에 젊은 감각이 물씬 풍기는 이국적인 디자인의 이 잠바가 마음에 들었다. 어떤 연유로 이 노인들 옷가게에 걸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옷에 반해서 살려고 주인에게 물었더니 삼만 원이란다. 사실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좀 깎아 보겠다고 깎자 했더니 ‘안 판다’ 한마디로 자르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머쓱해져 돌아섰다. 깎자고 한 주제에 그냥 덥석 사기도 그렇고 망설이다가 그 날은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다가 두어 달 후에 또 가서 흥정하고 또 가서 흥정하고 아는지 모르는지 그 주인도 늘 나를 처음 맞는 손님으로 대했다. 그렇게 오고 가고 하다가 한 열흘, 드디어 그 주인아주머니 입에서 ‘이만 오천 원만 내세요. 하나 남은 건 내가 입고 말아야지 으휴! ’ 하셨다. 그래서 결국 내 손에 들어왔다.

사실 그 옷이 색상이나 질감이나 또 디자인까지 탐나기는 했지만, 꼭 사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여유를 부리고 그 가게 앞을 지나갈 때는 그 옷이 궁금해서 있나 없나 찾아보곤 했었다. 그러다가 올여름 휴가 때에 티베트로 가기로 결정 났고 그곳에선 긴 팔 잠바가 필요하다고 한다. 워낙 고산 지대로 여름이긴 하지만 쌀쌀하다기에 ‘아 그 잠바면 제격이겠다.’하는 생각이 나서 그 집으로 갔는데 아주머니가 두말없이 에누리해 주어서 샀다. 그런데 그 옷이 간 곳이 없다.

집에 오자마자 거울 앞에서 한 번 입어보고 옷걸이에 건 모습까지는 기억이 있는데 이 옷을 들고 어디로 가 어디다 걸었는지 기억이 없다. 무슨 손바닥만 한 작은 물건도 아니고 그 커다란 잠바를 어디다 걸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이 방 저 방 다니며 옷걸이마다 찾아보아도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 이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온다. 설마 그 옷이 냉장고에 들어갈 리도 없고 그렇다고 쓰레기 봉지에 집어넣어 버렸을 리도 없고….

이런 건망증이 어제 오늘뿐이 아니다. 여고 동창들과 모임이 있어 한껏 모양을 내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을 나섰다. 동창들을 만나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갑자기 어디 연락할 일이 생각났다. 부랴부랴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꾹꾹 누르고 귀에 갖다가 댔는데 아무런 소리가 없다. ‘어 왜 소리가 안 나지? 고장인가?’ 그러는데 한 친구 왈 ‘얘! 너 그게 뭐니?“ ’ 그래서 내려다본 휴대폰은 휴대폰이 아니라 TV 리모컨이었다. 그 순간 친구들은 배를 움켜잡고 자지러지게 넘어가고 나도 내 어이없음에 같이 자지러지고.

생각해 보면 이 건망증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시장에 갔다가 싱싱한 시금치가 보이길래 두어단을 사 가지고 집에 왔다. ‘깨소금 넣고 조물조물 무쳐서 저녁 식탁에 올려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깨끗이 다듬어 씻어 놓고 냄비에 물을 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다른 일을 잠깐 보았다. 잠시 후, 드디어 물이 팔팔 끓기 시작했다. 팔팔 끓는 물에 데칠 시금치를 담아 놓은 바가지를 보았더니 빈 바가지다. 여기저기 살펴보아도 시금치가 온 데 간 데가 없다.

냉장고도 열어보고 김치 냉장고도 열어보고 나중에는 싱크대 위아래 쪽까지 열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나중엔 냉동고까지 열어 보아도 없다. 물은 설설 끓는데 시금치는 없고 결국 가스 불을 꺼 버리고 돌아섰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냄비에 담긴 물을 버리려고 뚜껑을 열었더니 거기엔 시금치가 곤죽이 되어 퍼져 있었다.

가끔 나는 생각 한다. 이게 치매일까? 건망증일까? 치매라고 단정 하려니 내가 너무 비참해지고 건망증이라 치부하려니 너무 심한 행동을 보이는 것 같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내 마음속의 지우개가 성능이 매우 좋은 게 문제긴 문제다. 지울 건 지우며 살아야 하는 게 순리대로 사는 방법이긴 하지만 손에 들고 있는 자동차 키를 찾고 설탕을 친다는 게 소금을 쳐서 반찬을 소태로 만들고 김칫거리 절이다가 까맣게 잊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