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아무리 가난해도 정직해야"… 편법의 유혹 막아준 어머니 말씀

내 어머니는 성이 왕(王)씨이다. 개성 북쪽의 박연폭포 인근에서 태어나셨고 스무 살에 개성 남쪽 동네인 개풍군 상도면으로 시집오셨다고 한다. 성이 왕씨인 걸 보면 고려 태조 왕건의 자손일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머니는 고생만 하시다 55세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다. 생전에 어머니의 발톱은 성한 곳이라고 한 군데도 없이 모두 뭉그러져 있었다. 집안일을 하다 절구에 자주 발톱을 찧었기 때문이라 했다. 6남3녀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어머니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는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나이 어린 동생들을 업어 길렀다. 시집와서는 정치인 시아버지를 뒷바라지하는 일에 거의 평생을 부엌에서만 지내셨다. 6·25 이전 개성 지역은 남한에 속해 있어 48년 제헌국회 선거와 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어머니의 시아버지인 할아버지는 두 차례 모두 당선되셨다. 그러나 6.25가 끝나고 나니 개성은 북한 땅이 되었고 지역구는 사라져버렸다. 어머니의 고생은 물거품이 되었고 할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꿈을 가졌던 아버지는 정치 낙오자가 되었다. 더욱이 업어 기르셨던 친정 동생들을 개성에 남겨놓은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어머니와 지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기껏해야 18년 안팎이다. 당시로써는 엄청난 노산인 서른일곱 나이에 나를 낳으셨으니 어머니는 나에 대한 애틋함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젖이 안 나와 미음으로만 키우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렸을 때 자주 아팠다. 초등학교 1학년 생활기록부를 보면 '허약하고 결석이 잦음'이라고 쓰여 있다. 안쓰러운 마음 때문인지 어머니는 나한테만은 몰락한 정치인 집안의 며느리로서 회한과 함께 고향인 개성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박연폭포가 어마어마해서 물줄기의 꼭대기를 본 사람이 없었지"라든지, "선죽교는 한두걸음 정도 되는 엄청 쬐그마한 다리였어. 진짜 큰 다리는 '야다리'라고 옛날에 오랑캐 낙타를 다리 밑에 걸어 굶겨 죽여 '낙타교'라고도 불렸지. 너는 그 '야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리시곤 했다. 그렇지만 매 한 번 안 대셨고 늦게 낳은 막내가 그저 무탈하게만 자라길 바라셨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인자하다고만 느꼈던 어머니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다. 당시에는 신문지를 노끈으로 묶어 지나가는 고물장수한테 무게를 달아 팔았는데 내가 꾀를 내어 신문지 사이에 얇은 나무판자를 넣어 무게를 늘린 것이다. 생각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걸 이상하게 여긴 고물장수는 즉각 알아차렸고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빗자루로 사정없이 나를 때렸다. "아무리 가난해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어떻게 우리보다 힘들게 사는 고물장수를 등쳐먹을 수 있느냐. 도대체 너는 커서 뭐가 될 거냐"며 울부짖으셨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랬어요"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용서를 빌었다.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편법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때 어머니의 노여움을 생각하며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 정도(正道)를 가려고 애쓰고 있다.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한테 친절했다. 시도때도 없이 일가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였고, 명절 때면 며칠씩 집에 머물러 있곤 했다. 없는 살림에 어머니는 손님들에게 정성스럽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저녁때만 되면 다리가 퉁퉁 부어있었다. 나는 그게 항상 불만이었다. 한번은 "우리 살기도 바쁜데 왜 엄마는 사서 고생하면서 바보같이 사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때 어머니는 "내 손이 바빠야 다른 사람 손이 편하다"고 말씀하셨다. 실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던 어머니의 손은 매우 거칠었다. 나는 유난히도 금융 위기가 생길 때마다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고, 한때 왜 하필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원망도 해 보았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겨 보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이 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는 내가 중2 때 유방암에 걸리셨다. 첫 번째 수술로 한쪽 가슴을 절개한 후 비교적 건강을 되찾은 듯싶었지만, 4년 만에 암이 재발했다. 두 번째 큰 수술 끝에 이제는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집으로 돌아오셨다. 방사선치료와 수술 후유증으로 어머니의 모습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었다. 죽음을 알게 된 어머니는 나한테 개성 얘기를 꺼내셨다. "큰형하고 의논해서 나 죽거든 개성 가까운 곳에 묻어주고 통일이 되면 개성으로 이장해 달라"고 하셨다. 일단 개성에 가까운 파주 금촌리에 모셨다.

되돌아보면, 어머니는 나에게 "무슨 일을 하라" "나중에 커서 이런 사람이 되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인생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남북통일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다. 60년대 이후 경제발전 과정에 비춰보면, 금융을 잘 활용하면 세금을 최소화하면서 북한 개발에 충분한 자금을 댈 길이 있다. 지난 30년 금융 분야의 공직 경험을 토대로 이를 실행하고 싶다. 통일이 되면 어머니 말씀대로 정직한 방법으로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금융으로 북한을 개발하고 싶다. 그리고 박연폭포가 잘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다시 모시고 싶다.


['국제금융통' 신제윤 위원장은]

신제윤(56) 금융위원장은 휘문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행정고시 24회에 수석 합격했다. 국제금융과장, 금융정책과장 등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 재무 관료로 2008년 한·미 통화 스와프와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의 실무 주역을 맡았다. 털털하고 유머가 넘쳐 재경부 직원들이 뽑는 '닮고 싶은 상사'로 2006년부터 5년간 내리 1위에 선정됐다. 장녀 아영(27)씨는 미 하버드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스포츠 채널인 SBS ESPN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