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죽은 남자 골퍼 위해 발 벗고 나선 '히든 챔피언'

"중학교 졸업하고 30년 넘게 구두만 만들어온 제가 골프대회까지 개최했으니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20일 강원도 고성군 파인리즈컨트리클럽(파71·7209 야드). 21일 개막하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코리안투어 바이네르 파인리즈 오픈(총상금 5억 원·우승상금 1억원)을 앞두고 연습 중이던 프로골프 선수들은 한 중년 남자를 볼 때마다 "대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인사를 받는 사람은 이 대회를 만든 구두 제조업체 '안토니'의 김원길(53) 대표였다. 올해 2승을 올린 김우현(23) 프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선수들에게 일일이 컨디션을 묻고 "열심히 해서 꼭 좋은 성적을 내달라"고 했다. 반갑게 인사하며 안부를 묻는 김 대표와 선수들은 삼촌과 조카 사이처럼 보였다.

이번 대회는 현역 프로 골퍼의 아버지가 주최하는 첫 KPGA투어다. "저희 회사가 아직은 골프대회를 열 만큼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들이나 다름없는 골퍼들이 대회가 부족해 풀이 죽은 모습을 보기가 안타까워서 조금 무리를 했습니다." 김 대표는 지난 5월 프로 데뷔 이후 4년간 우승하지 못하던 아들이 해피니스 송학건설 오픈에서 첫 승을 올리자 한국 남자 골프의 발전을 위해 대회 개최를 결정했다.

2014 시즌을 기준으로 할 때, 여자 대회(KLPGA 투어)는 대회 수 26개에 총상금 160억원에 이르는 반면, 남자 대회(KPGA 투어)는 대회 수 14개에 총상금 86억원으로 대략 절반 수준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여자 대회는 계속 늘어나지만, 남자 대회는 있던 것도 폐지되는 추세라는 점이다.

당시 중졸 학력으로 국내 제화업계의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잘 알려지지 않은 우량 중소기업)'을 키워낸 아버지와 프로골프 챔피언이 된 아들의 이야기는 주목을 받았다. 사업상 골프를 시작했던 김원길 대표는 아들이 네 살 때 클럽을 손에 쥐여주며 골프 선수로 키웠다. 김 대표도 베스트 스코어가 3언더파 69타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 김 대표는 "골프도 사업과 비슷해서 빈틈없이 준비하고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겠다는 배짱이 있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이날 새벽 인천공항에 입국하자마자 고성으로 달려왔다. 3박5일 일정으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패션쇼에 참가한 뒤 숨돌릴 틈도 없었다. 이 대회가 끝나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직원들과 함께 가야 한다. 김 대표는 "골프대회를 열기로 한 뒤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사업에 쏟고 있다"며 "사업을 번창시켜 골프대회도 더 크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골프대회를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제화업계에서 마케팅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김 대표는 이번 대회에서도 다양한 경품 행사를 마련하는 등 여자 골프에 밀린 남자 골프의 인기를 살릴 방안을 찾고 있다. 그는 "여자 골프가 예쁜 샷과 아기자기한 게임과 화려한 의상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남자 골프는 파워와 묘기 샷 등 골프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골프대회에 돈을 쏟아 붓는 게 아니라, 홍보 효과를 극대화한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골프대회를 주최하려면 보통 총상금의 2~3배 규모의 돈이 들어간다.

파인리즈 컨트리클럽에서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보인다. 김 대표는 "젊은 시절 구두 일거리가 없으면 설악산에 와서 아르바이트하며 생계를 꾸렸다"며 "아들뻘인 젊은 골퍼들이 이곳에서 더 큰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