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카메라로 쓴 가을 이야기

밤새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아침을 맞아 이슬비 되어 내린다. 멈추었다 한두 방울 내린다. 저만치 고봉산에 안개 줄기가 허리를 둘렀다. 이른 새벽에 깬 비둘기 하늘을 난다. 산 중턱에서 우는 뻐꾸기 울음소리 낮게 울림 된다. 아침을 깨운다.
 
들녘의 논에 청록의 벼 잎이 누르스름해간다. 엊그제 모내기를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느 사이 벼 이삭이 피어난다. 누르스름한 기색이 완연하다. 비를 맞아 더욱 선명하다. 비 갠 후 먼 산이 더 가깝게 보인다는 ‘우후산색근(雨後山色近)’이다. 하루가 다르게 벼가 여물어간다.

논두렁에 예취기를 돌리는 농부의 손길도 바쁘다. 젖은 풀잎에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는다. 잘린 풀잎 조각이 바지에 달라붙는다. 벼 수확에 대비해 웃자란 두렁의 풀을 정리한다. 농부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논을 휘둘러본다. 익어가는 벼 이삭을 바라본다. 땀 흘린 이른 봄부터 여름이 스치고 지나간다. 땀방울이 알알이 이삭에 들어갔다. 마음이 풍성해진다. 지팡이를 짚고 논을 둘러보는 할머니가 정겹다. 한 폭의 수채화다.

장석주 시인은 ‘한 알의 대추’에서 한 알의 대추가 그냥 그렇게 익을 리 없다 읊었다. 한 알의 대추가 붉게 익어가기까지엔 숱한 벼락과 천둥이, 무서리 내리던 수많은 밤이 지나야 했다고 풀어 놓는다. 한 톨의 작은 벼에도 숱한 여름날의 뙤약볕과 농부의 마음이 속속들이 자리 잡았지 싶다. 천지를 뒤흔든 태풍도 지나가고 천둥벼락도 숨죽이게 했다.

벼멸구도 괴롭혔다. 이화명나방도 줄기 속을 뚫고 들어가 벼 이삭에 고통을 주었다. 도열병, 잎집무늬마름병, 흰빛 잎마름병, 줄무늬잎마름병 그리고 오갈병도 그랬다. 논바닥이 갈라지는 가뭄도 상처를 입히기도 하였다. 참고 견디며 환경에 대항하며 가을을 기다렸다. 오곡이 익어가는 가을이다. 이제 벼 낱알의 속이 꽉 차간다. 익어간다. 기다림과 인내의 결과다. 한 알의 대추가 붉게 익어가듯이 말이다.

주변의 밭에도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아마 가을 햇살이 따사하게 내려 앉는 날이면 농가의 마당에 태양초 만드는 허리 굽은 할머니, 아들 생각에 행복할 것이다. 햇빛이 그림처럼 찾아들지 모른다.

밭두렁엔 호박꽃이 막바지 기지개를 켠다. 호박잎 사이로 늙은 호박이 물기 머금은 채 하늘을 바라본다. 작은 잠자리 낮게 난다. 농부의 밝은 미소가 벼 이삭에 오버랩 된다. 산자락의 토종 밤나무에 작은 밤송이가 듬성듬성 달렸다. 밤송이의 가시가 곧추섰다.

가을이 서서히 익어간다. 들녘에 선 나도 덩달아 여유로워진다. 자연의 변화에 매료된다. 빠져든다. 카메라로 가을 얘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