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했던가.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 시절, 그래도 잠시 허리를 펴고 웃는 날이 있었다. 고운 빔을 입고, 맛있는 송편을 먹으며 가족들과 함께한, 1년 중 가장 흐뭇했던 날에 대한 추억.
소년 씨름왕
한가위가 다가오면 마음이 설렌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서다. 얼굴에 배시시 미소를 띤다. 뭉게구름 흐르는 먼 하늘을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고향이 지리산 청학동 계곡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뭇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예전엔 정말 지지리도 못 먹고 살던 두메산골에 지나지 않았다.
추석에는 다른 지역도 비슷하겠지만, 고을 잔치가 열렸다. 고향마을은 계곡을 돌고 돌아 흘러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상류 지역에 있다. 내가 살던 마을 앞을 흘러가던 강변에는 꽤나 넓은 터가 있었다. 한 갈래로 흐르던 강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가운데에 논배미도 있고 아름드리 팽나무가 서너 그루서 있었다. 추석이면 해마다 그곳에 터를 잡고 잔치가 열린다. ‘콩쿠르대회’라고 불렀던 노래자랑, 그네뛰기, 널뛰기, 씨름대회가 열려 고을이 떠들썩했다. 축제였다. 농악으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다.
나는 씨름판을 좋아했다. 맨 앞줄에 앉아 구경도 하고 직접 출전하기도 했다. 씨름판에는 강변의 부드러운 모래를 채워넣었다. 씨름 장사 경품으로 송아지 한 마리가 옆에 매어져 있었다. 씨름대회는 성인부와 소년부로 나눠 진행됐다. 소년부의 상품은 학용품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달리기를 잘하던 소년이었고 팔힘이 세어서 동네 청년들과도 겨뤘다. 씨름을 특히 잘했다. 추석의 씨름대회가 은근히 기다려지곤 했다. 나의 씨름 실력을 뽐낼 수 있어서기도 하였지만, 상품으로 받는 공책에 욕심이 생겨서다. 공책을 풍족하게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씨름에 출전하여 상으로 받은 공책은 거의 일 년을 쓸 정도로 양이 많았다. 나의 승수가 많아서 그랬다. 한번은 계속하여 상대를 물리치자 다른 소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나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여 다음 씨름판을 진행하기도 했다. 나는 힘을 이용한 씨름을 한 게 아니었다. 허리의 유연성을 이용하여 넘어질 듯한 순간에 상대방을 뒤집는 기술을 발휘했다. “으라차차!” 소년의 변성기 목소리가 강변을 흐르며 질 것 같던 내가 뒤집기로 역전하면 지켜보던 어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천하장사 이만기가 전성기에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그런 기술을 닮았다면 과장이려나? 별도로 배운 적은 없지만 선천적으로 감각을 지녔고, 평소에 동네 친구들과 씨름을 하면서 터득했던 것 같다. 한가위가 다가오면 어린 시절 씨름판의 일이 떠오른다. 추억은 행복을 싣고 온다. 지금은 씨름판이 섰던 그 강변이 하동호에 묻혀 추억이 더욱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변용도 사진작가
깨송편에 깨지고 고무줄놀이로 털고
‘대체 송편엔 왜 살이 많은 거람. 만두처럼 얇은 살에 알맹이만 가득하면 좋겠다!’ 추석 전날 솔잎에 갓 쪄낸 깨송편을 시식할 때마다 초등생인 나는 속으로 구시렁댔다. 소만 먹으면 좋겠는데 그걸 감싸고 있는 떡까지 먹자니 달달하고도 고소한 깨 맛이 덜해지는 것이었다. 엄마 모르게 송편 하나에서 소만 빼내 입에 넣었다. 너무 맛있어서 하나가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세 개로 겉만 남은 송편이 늘어났다. 그 위에 송편 소쿠리의 솔잎을 슬쩍 덮어 시치미를 뗐지만 금세 발각될 걸 왜 몰랐던고. 엄마 손바닥이 내 등짝 위로 날아왔다.
그러나 골목길에 나가 여자애들과 고무줄놀이에 신바람을 내노라면 언제 깨송편으로 깨졌는지 모르게 몸도 마음도 짱짱해졌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명절이면 더 여럿 모여든 아이들이 끝없이 불러젖혔던 동요에 맞춰 팽팽한 고무줄을 가랑이에 끼고 오른편, 왼편, 위로도 뛰다가 두 손을 땅에 짚고 다리를 뻗어 고무줄을 걸어 넘기까지 했다. 엄마는 추석이면 지금도 속 빼먹은 송편을 들먹일 때가 있다. 고무줄놀이도 사라진 이제, 뭐 좋은 얘기라고 때마다 듣는 귀를 털어버리기도 마땅찮아서 내 집 추석에는 아예 깨송편이 없다. 성진선 자유기고가·번역가
추억의 민속놀이 심판
추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송편, 차례 그리고 민속놀이다. 그중에서도 윷놀이가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가장 많이 즐기는 놀이일 것이다. 가끔은 그 옛날 길거리에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하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마침 올 3월 경기도 양평에서 민속놀이 10종목(윷놀이, 말타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비석치기, 굴렁쇠 굴리기, 투호, 제기차기) 시합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반인 대상 시합인데 많은 분들의 호응 속에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시합 종목인 10가지 민속놀이는 기성 세대라면 어릴 때 누구나 즐기던 추억의 게임이다.
나는 민속놀이 심판 대표로 참여했는데 지켜보는 내내 흐뭇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동반하여 참가하는 어른들도 처음에는 아이에게 시합을 맡기다가 나중에는 본인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민속놀이를 보니 옛 추억이 되살아나서 다시 한 번 경험하고 싶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비석치기가 가장 인기 있는 놀이였다. 동네에서 남자 아이,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돌을 세워놓고 치며 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중학생 때는 교실 안에서 말타기가 한창 유행이었다. 힘껏 달려가 상대방 팀을 무너뜨릴 때 어찌나 스릴이 넘치던지!
오랜만에 민속놀이 심판으로 참여하면서 다시금 우리네 전통놀이가 정말 재미있고 정서적으로도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해 실내에서만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체력도 떨어지고 눈도 나빠지고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올해도 어김없이 9월이 오고, 추석이 온다. 이번 기회에 각 가정마다 우리 민속놀이를 아이들에게 한 가지씩이라도 물려주는 이벤트를 하면 어떨까. 이렇게 하면 우리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윤경필 모웨이아카데미 원장
아내의 한가위
요즘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보고 있노라면 보물처럼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달덩이 같이 아름다운 나이에 월세로 사는 장남인 나에게 시집을 온 것도 고마운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동생 넷이나 대학 공부를 시키고 우리 집안을 화목하게 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결혼하고 10년 정도는 추석 차례와 명절 준비를 맏며느리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동서가 서울서 뒤늦게 내려오더라도 반가이 맞으며 잘 지내왔다. 하지만 그이는 철인이 아니었다. 한창 때는 젊음의 힘으로 버텨나갔으나 해가 거듭할수록 명절 증후군이 심해져 허리부터 온몸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미련한 남편은 그제야 깨달았다. 기계도 쉬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데, 시집 온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가사를 꾸려가다 보니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형제가 돌아가면서 차례나 제사를 모시자고 아우들에게 제안하면 어떨까 하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아내는 동서들이 먼저 그런 제의를 해오면 모를까 절대 그런 이야기는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펄쩍 뛰었다.
유산 한 푼 물려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장남이고 장손이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혼자 고민하며 끙끙 앓고 있는데 늦게나마 아우님들의 배려와 신의 가호로 어려운 숙제가 해결되었다.
정년퇴직 후 서울에 직장을 잡게 되어 나도 아우들과 같은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일단 오피스텔에 임시로 살림을 꾸렸는데, 좁은 곳에서 모든 준비를 할 여건이 안 되니 두 동서들과 차례나 제사 준비를 서로 나누어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이제는 새로운 제사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이후로는 아내의 명절증후군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관습이란 정말 무섭다. 그 간단한 일을 해결하는 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리다니.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아내의 아름다움은 온갖 인고와 난관을 극복하고 영원히 지지 않는 향기로운 한 송이 국화꽃과 같다고. 신용재 국제계약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