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빨랫줄에 고추 말리기

동트기 직전에 일어나 아파트 옥상 텃밭으로 향한다. 눈 뜨자마자 옥상 텃밭에 올라오는 건 텃밭에 자라고 있는 식구들이 궁금하기도 하려니와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간밤에 내린 비에 방울토마토에 잠시 머물던 빗방울이 발자국 소리에 놀라 후드득 떨어진다. 며칠 전에 달린 수박 두어 덩이가 다른 녀석들보다 더 예쁜 건, 이런 곳에선 안 달릴 거로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풋고추를 먹겠다고 고추나무 몇 그루 심어 놓았더니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혼자서 다 먹기엔 벅찼다. 이웃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고도 아직 주렁주렁하다. 제법 붉게 익어가는 고추들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냉동고에 더는 붉은 고추를 넣을 수도 없다. 이미 일 년 먹어도 될 만큼 붉은 고추가 많다.

붉은 고추를 말려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은 바구니에 담아 옥상에 뜨거운 햇살에 내놓았다. 그것도 문제가 생겼다. 출근하면서 고추를 잘 마르라고 이리저리 뒤적여 주는 것도 일이었다. 묘책이 필요했다. 실에 꼬여서 널어놓을까? 아니면 전기장판 깔고 거기다 말려? 둘 다 웃긴다. 고추나 많다면 모를까 그까짓 고추 몇 개 말리자고 그리 부산을 떨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열흘 전쯤이었다. 비 온 뒤끝이라 텃밭 식구들이 궁금하여 옥상에 올라갔다. 하늘은 구름 몇 조각 흘러가는 하늘은 높고 더없이 맑았다. 산들바람에 노란 집게가 빨랫줄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때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 ‘그래, 빨랫줄에 말리는 거야.’ 생각은 행동으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입추가 지나 하늘은 푸르고 구름 몇 점 흘러가는 날. 붉은 고추는 빨랫줄에 걸렸다.

이불 빨래를 널러 왔던 오 층 아줌마가 호호호 웃고 내려가고, 내 농사 스승님은 어이없다는 듯 잠시 바라보다 박장대소를 하더니 ‘고추는 세물 때가 가장 좋은 것이여. 첫물 고추는 피가 너무 두꺼워 맛이 없다구.’ 그러고는 힁허케 내려가셨다. ‘세물 때? 그게 뭐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암튼 모두 환하게 웃으니 일거양득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곧 알게 될 테고 나야 산들바람에 고추 말리고, 아파트 사람들을 한바탕 웃게 하고 그럼 되었다.

내 나이 예순이 넘었다. 그 예순이 넘도록 수도 없이 김치를 담그고 고춧가루를 넣어 반찬을 만들었다. 그래도 난 고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빛깔만 좋으면 좋은 거로 생각하고 사서 먹었다. 햇빛에 말린 태양초가 좋다고 해도 사실 어떻게 생긴 것이 태양초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냥 빛깔 좋은 것이 좋겠지 했다. 그런 내가 고추를 말리고 보니 태양초란 꼭지가 노란색이다.

산들바람이 분다. 빨랫줄에 걸린 고추가 한들거린다. 뜨거운 햇살을 몸속 깊숙이 받아들인 고추가 오늘따라 더욱 붉다. 올 김장은 이 태양초로 담그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며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