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노세 노세

“개강 날 강의실에 들어섰더니 20여 명의 학생이 배우가 되겠다고 앉아있었다. 혹시 부모의 반대는 없었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그런 학생이 없어서 놀랐다.” 영화 ‘서편제’의 주역으로 보다 널리 알려진 김명곤 동양대 석좌교수가 얼마 전 한 강연회에서 꺼낸 말이다.

이렇게 놀라는 건 김 교수처럼 60대는 물론이고 50대들에게조차 어쩌면 당연하다. 그 부모 세대 가운데 자식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는 걸 환영하는 이들은 정말 드물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선 심지어 음악이나 미술 쪽으로 기웃거리는 것조차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 원로 코미디언 송해 씨가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고 있다는 요즘이 아닌가. 아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돈 벌어 오지, 집에 붙어있을 때가 별로 없지, 팔도 두루 다니며 특산물이란 특산물은 죄다 가져오지….

웃자고 넘기기에는 뼈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아흔의 반 토막만 되어도 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마당이니 말이다. “퇴직하는 친구들이 5년 새 부쩍 늘어났는데, 오죽하면 ‘송해가 나올 때 TV를 아예 꺼버린다’는 친구도 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그는 덧붙인다.

“어떤 친구는 여행이고 운동이고 한 3년간 하고 나니 시들하고, 노는 사람이랄까 봐 대낮에 아파트 단지를 나다니는 것조차 꺼리기도 한다. 그동안 개미처럼 일하는 것만 알고 살아오다가 일을 놓으니 ‘일하다’의 반대로 ‘논다’의 처지가 됐다고 여긴다. 열심히 살아온 내가 이게 뭔가 하면서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다. ‘그래도 내가 가장인데’하는 ‘개미 꼴통’이 남아있어서다. 일하다의 반대는 ‘일하지 않다’이지 논다가 아니다. 수명이 늘면서 60세부터 30년은 개미가 아닌 베짱이로 놀아야 되는데 어떻게 노느냐, 노는 게 중요해졌다.”

그 좋은 예로 50대 중반 퇴직자였던 한 전직 공무원의 경우를 얘기했다. 차관급 엘리트였던지라 그를 부르는 곳은 여럿 있었지만 신통치 않아 거절했단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연락도 오지 않고 1년여를 술과 한탄으로 보냈다. 문득 모습조차 달라진 자신을 깨닫게 됐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자문해 보았다.

중학교 때 미술반에 속했던 생각이 나서 동네 문화센터에 다니며 그림을 시작했다. 온통 아줌마들 가운데 아저씨로는 혼자였지만 열심히 그려서 전시회도 수차례 열게 됐다. 미술협회에 이름이 등록되고 명함에 ‘화가’를 넣을 수 있게 되면서 그는 이제 학생이 아닌 강사로서 ‘잘 노는’ 삶을 말하고, 또 살고 있다고 한다.

잘 노는 것은 이처럼 은퇴 이후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물론,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절대적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요즘 초등생의 90%, 중학생의 50%, 고등학생의 20~30%가 연예인 되는 게 희망”일 정도라니 노는 코드를 모르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

기업 또한 아이디어가 솟고 생산성이 오르는 조직을 만들자면 입 다물고 일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잘 놀게 하나 방안을 연구하는 마당이다. 비행장 인근에 있는 한 공장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심한 소음 때문에 작업라인의 아줌마들에게 귀마개를 착용케 하면서부터 이상하게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원인은 바로 ‘수다’가 불가능해진 데 있었다. 일의 윤활유가 사라진 것이었다. 귀마개를 떼고 일하게 하자 생산성도 덩달아 올라갔다.
 

‘뛰는 놈’  ‘나는 놈’  ‘노는 놈’ 그 위에…

논어의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는 이미 널리 알려진 공자 말씀이다. 여기서 知者는 ‘뛰는 놈’, 好者는 ‘나는 놈’, 樂者는 ‘노는 놈’으로 풀어낸 김 교수는 “놀 줄 아는 사람과 기업이 성공하는 시대”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 자신도 국립극장장 재직 당시 4백여 명의 구성원을 양분하고 있는 개미류의 공무원들과 베짱이류의 예술인들이 어떻게 하면 한데 어우러져 ‘노는 놈’이 되게끔 하느냐에 머리를 짜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국영수’를 파고들어 오늘에 이른 부류와 ‘예체능’ 부류 모두에게 직장이 재미있게 노는 놀이터가 되어야 조직의 활성화가 가능하리란 판단에서였다.

처음 깔아놓기까지가 어색했지 멍석이 펼쳐지자 국영수 파 가운데 숨어있던 끼들이 드러나면서 예체능 파와 서로 소통의 계기를 갖게 됐다. 극장은 활기를 띠어 갔고, 그는 임기를 3차례나 역임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극장의 상급기관인 문화관광부의 장관직까지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노는 놈’ 지망생들이 무척 많아져서 ‘슈퍼스타 K’ 같은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경우는 2백만 대 1의 경쟁에 달할 정도라고 하더라. 그러니 대충 놀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게 됐다. 이제는 ‘즐기는 것만 못하다’로 마무리된 공자 말씀에 ‘즐기는 것은 미치는 것만 못하다(樂之者 不如狂之者)’를 보태야 할 판이다. 바야흐로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의 시대가 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랑 미친 듯이 놀지 않았다면 세계 최고에 이를 수 있었을까. 어떤 분야든 10년은 미쳐야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돈도 벌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현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창조경제도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그는 “과거에는 국영수를 중시하고 거기 쏠렸지만 이제는 예체능이 중요해진 시대”라면서 “젊어서 국영수 공부로 먹고 살았다면 늙어서는 예체능으로 사는 게 좋아 보인다. 또한 은퇴 후 잘 노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이 어울려 함께 노는 집이 잘 되더라”고 말했다.

오래된 노랫가락이 떠오른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며는 못 노나니….” 어째 열심히 일해야 할 젊어서부터 놀자는 타령인가 싶기도 한 노래였다. 예전엔 곧잘 들리곤 했었는데 요새는 별로 들어볼 수 없는 것 같다. 늙어지면 못 노는 게 아니라 젊거나 늙거나 놀아야 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일까. 그것도 그냥 하릴없이 논다거나 대충 놀아서도 아니 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무언가에 미친 듯이 ‘노는 놈’이 많아질 때, 나도 살고 나라 경제도 살아나는 시대가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