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호유학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논산시 연산면에는 김장생의 아버지가 설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으며,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1634년(인조12)에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후 1660년(현종1)에 '돈암(遯巖)'이라고 사액 되었으며 1658년(효종9)에 김집(金集)과 1688년(숙종14)에 송준길, 송시열을 각각 추가 배향하여 모두 4위를 모시고 있다. 1880년(고종17)에 서원이 있던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피해가 있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서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며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이며 김집(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으며 20세 무렵에는 이이(李珥)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뒤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원래 외부 출입문은 외삼문이라고 하여 삼문(三門)의 형태를 갖추는 게 보편적이며, 대부분 누각의 아래에 삼문을 내고 있는데 이곳 돈암서원은 단일문의 형태이며, 바깥공간에 추가로 담을 둘러 쌓고 그 중앙에 누각을 최근에 새로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입덕문을 들어서기 전 앞쪽에 황강김선생 정회당 사적비(黃岡金先生靜會堂事蹟碑)가 서 있는데 황강은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로 돈암서원 창건 이전에 김장생의 아버지 황강 김계휘(金繼輝,1526~1582)가 명종 12년(1557) 연산으로 퇴거해 와서 대둔산 고운사 경내를 빌려 약 6년간 머물며 정회당을 설립해 후학양성과 향촌교화에 전념하였음을 기리는 비이다.
정면 강당은 양성당(養性堂)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좌우로 온돌 단칸방이 하나씩이며 중앙 3칸은 툇마루를 두고 문짝을 달았지만 커다란 마루이며 뒷면에는 쪽마루가 붙어있어 문짝을 들어 올리면 커다란 강의실이 되는 것이다.
양성당은 원래 최청강(崔淸江)의 별장 '아한정'이었는데 김장생의 백조부 김석(金錫)이 구입하였고, 아들이 없던 김석이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金殷輝)를 양자들여 가계를 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아한정은 김장생이 어렸을 때 수학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 후에 아한정은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없어져 터만 남게 되었으며 김장생이 그 자리에 소당(小堂)을 짓고 양성(養性)이란 편액을 건 다음 강독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런데 입덕문을 들어서서 강학공간인 강당과 동재, 서재에 이르기 전에 좌우로 건물이 한 동씩 있다. 오른쪽 건물은 경회당으로 현재 관리사무소로 사용 중이며 왼쪽은 응도당(凝道堂)인데 보물 제1569호이다. 1880년 돈암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될 당시 응도당(凝道堂)은 구터에 남아 있다가 1971년에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는데 옮길 때에 '숭정 6년 계유(癸酉)' 명문을 발견하여 인조 11년(1633)의 초창기 건물임을 알 수 있는 정면 5칸·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조선 후기 서원의 문화사적 성격 중 장수강학(藏修講學)의 강당(講堂)으로 보기 드물게 큰 규모와 옛 규제를 충실히 따른 건물이다.
강학공간의 뒤편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중에서 후묘(後廟)에 해당하는 사당 숭례사(崇禮祠)로 김장생과 김집, 송준길, 송시열 4인을 모셨으며 강당인 양성당(養性堂)의 뒤편으로 담을 쌓고 내삼문을 달았는데 평시에는 잠겨있어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다.
그런데 내삼문을 가만히 보면 하나의 구조물에 3개의 문이 아니라 각각의 문 3개를 세웠음을 볼 수 있다. 특이하다. 게다가 내삼문을 연하여 쌓은 앞면의 담장은 얼핏 화려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고궁의 꽃담 같다. 그리고 거기에는 각각 4글자씩, 3단어가 씌어있다. 다만 정자체가 아니어서 일반인이 읽기 어렵다.
그 글자는 지부해함(地負海涵 :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인데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이 예학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자를 새긴 것이라고 한다.
사당의 오른쪽으로는 제사준비와 관련한 건물인 전사청이 있고 앞쪽 왼편으로는 서책 등 간행물 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장판각에는 김장생과 아들 김집의 문집과 아버지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적은 기록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강당의 왼쪽으로는 정회당(靜會堂)이 있다. 정회(靜會)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 김장생 부친이 강학하던 건물인데 1954년에 대둔산 자락 고운사 터에서 옮겨왔다.
이렇게 돈암서원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려져 곧 등재될 것으로 보이는 9개 서원을 추가하여 답사하는 중이다. 서원을 나오니 가까운 곳에 사계 김장생 일가의 묘역이 있고 주변 볼거리를 겸하여 걷기 코스 '솔바람 길'이 개설되었다. 나름대로 많은 탐방객이 찾아주면 좋으련만 생각보다 한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