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9.12 11:06

돈암서원(遯巖書院)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사적 제383호)

조선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호유학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논산시 연산면에는 김장생의 아버지가 설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으며,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1634년(인조12)에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후 1660년(현종1)에 '돈암(遯巖)'이라고 사액 되었으며 1658년(효종9)에 김집(金集)과 1688년(숙종14)에 송준길, 송시열을 각각 추가 배향하여 모두 4위를 모시고 있다. 1880년(고종17)에 서원이 있던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피해가 있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돈암서원은 동남방향에서 다가가게 되어있어 홍살문이 빗각으로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시커멓게 낯선 하마비가 있었다.
▲돈암서원은 동남방향에서 다가가게 되어있어 홍살문이 빗각으로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시커멓게 낯선 하마비가 있었다.
조선말 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시행됨에도 존속된 47개 서원중 하나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시키기 위하여 현재 잠정목록에 올려진 9개 서원 중 하나로 곧 세계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보인다. 돈암(遯巖)은 서원이 창건되었던 논산시 연산면 하임리 숲말 산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현재 서원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는데 위치확인이 어려워 답사하지 못하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서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며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이며 김집(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으며 20세 무렵에는 이이(李珥)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뒤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돈암서원 건물배치도. 01. 입덕문   02. 경회당   03. 거경재   04. 정의재   05. 양성당   06. 돈암서원 원정비   07. 응도당   08. 정회당  09. 장판각   10. 내삼문   11. 숭례사   12. 전사청   13. 황강김선생 정회당 사적비   14. 산앙루   15. 홍살문, 하마비
▲돈암서원 건물배치도. 01. 입덕문 02. 경회당 03. 거경재 04. 정의재 05. 양성당 06. 돈암서원 원정비 07. 응도당 08. 정회당 09. 장판각 10. 내삼문 11. 숭례사 12. 전사청 13. 황강김선생 정회당 사적비 14. 산앙루 15. 홍살문, 하마비
김장생의 예학론은 양란(兩亂) 이후 혼란해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즉 정통(正統)에 중점을 두었고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 세력의 정치 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 아들인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등 당대 최고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돈암서원을 찾아간 첫 느낌은 간결하다였다. 대략 남향으로 지어진 서원은 전체적으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소박하고 정갈해 보였는데, 도로에서 접근하는 방향이 우측에서 빗각으로 다가가게 되어있어 조금 낯설어 보였다. 접근 각도에 맞추어 역시 빗각으로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돈암서원은 고정산줄기가 이어지는 중간쯤에 있으며 동쪽을 향해 앞으로는 들판을 가로질러 연산천이 흐르고 뒤로는 고정산줄기가 배산을 형성하는 배산임수 형태의 비교적 평지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전면 좌측에는 계룡산, 우측에는 대둔산이다.

▲서원 남쪽 정면에는 2층 누각 산앙루(山仰樓)가 의젓하게 자리 잡았다.
▲서원 남쪽 정면에는 2층 누각 산앙루(山仰樓)가 의젓하게 자리 잡았다.
▲누각 산앙루의 뒷모습. 작은 경회루가 연상되는데 최근에 새로 지은듯하다.
▲누각 산앙루의 뒷모습. 작은 경회루가 연상되는데 최근에 새로 지은듯하다.
▲누각 산앙루(山仰樓)의 현판, 앞면 현판의 뫼산(山)자가 특이하다. 뒷면에 걸린 현판은 정상적으로 썼다.
▲누각 산앙루(山仰樓)의 현판, 앞면 현판의 뫼산(山)자가 특이하다. 뒷면에 걸린 현판은 정상적으로 썼다.
▲원생들이 모여서 쉬거나 학문을 토론하는 누각, 손님을 모셔서 함께 하는 공간에 '호연지기' '음풍농월'등의 현판이 보인다.
▲원생들이 모여서 쉬거나 학문을 토론하는 누각, 손님을 모셔서 함께 하는 공간에 '호연지기' '음풍농월'등의 현판이 보인다.
▲서원을 들어서는 출입문은 입덕문(入德門)이다. 돈암서원 현판이 크게 걸려있고, 뒤쪽에 입덕문이라 걸었다.
▲서원을 들어서는 출입문은 입덕문(入德門)이다. 돈암서원 현판이 크게 걸려있고, 뒤쪽에 입덕문이라 걸었다.

원래 외부 출입문은 외삼문이라고 하여 삼문(三門)의 형태를 갖추는 게 보편적이며, 대부분 누각의 아래에 삼문을 내고 있는데 이곳 돈암서원은 단일문의 형태이며, 바깥공간에 추가로 담을 둘러 쌓고 그 중앙에 누각을 최근에 새로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입덕문을 들어서기 전 앞쪽에  황강김선생 정회당 사적비(黃岡金先生靜會堂事蹟碑)가 서 있는데 황강은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로 돈암서원 창건 이전에 김장생의 아버지 황강 김계휘(金繼輝,1526~1582)가 명종 12년(1557) 연산으로 퇴거해 와서 대둔산 고운사 경내를 빌려 약 6년간 머물며 정회당을 설립해 후학양성과 향촌교화에 전념하였음을 기리는 비이다.

▲황강김선생 정회당 사적비.
▲황강김선생 정회당 사적비.
이렇게 바깥 공간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적당한 크기의 마당을 두고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중에서 전학(前學)에 해당하는 강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 서재가 ㄷ자 형태로 직각 배치되어 있다. 한눈에 보아도 정갈하다.

▲전면이 강당 양성당, 좌우가 동재와 서재의 강학(講學) 공간으로 서원의 핵심지역이다. 강당 뒤로 사당 지붕이 보인다.
▲전면이 강당 양성당, 좌우가 동재와 서재의 강학(講學) 공간으로 서원의 핵심지역이다. 강당 뒤로 사당 지붕이 보인다.

정면 강당은 양성당(養性堂)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좌우로 온돌 단칸방이 하나씩이며 중앙 3칸은 툇마루를 두고 문짝을 달았지만 커다란 마루이며 뒷면에는 쪽마루가 붙어있어 문짝을 들어 올리면 커다란 강의실이 되는 것이다.
 
양성당은 원래 최청강(崔淸江)의 별장 '아한정'이었는데 김장생의 백조부 김석(金錫)이 구입하였고, 아들이 없던 김석이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金殷輝)를 양자들여 가계를 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아한정은 김장생이 어렸을 때 수학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 후에 아한정은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없어져 터만 남게 되었으며 김장생이 그 자리에 소당(小堂)을 짓고 양성(養性)이란 편액을 건 다음 강독하는 장소로 삼았다.

▲돈암서원의 강당 양성당(養性堂).
▲돈암서원의 강당 양성당(養性堂).
▲강당 앞에 선 비석은 돈암서원 원정비로 문하생들이 서원을 세운 경위와 김장생, 김집 부자의 학문과 업적을 적은 것이다. 원래 서원 자리에서 옮겨올 때 함께 왔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전액은 김만기,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강당 앞에 선 비석은 돈암서원 원정비로 문하생들이 서원을 세운 경위와 김장생, 김집 부자의 학문과 업적을 적은 것이다. 원래 서원 자리에서 옮겨올 때 함께 왔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전액은 김만기,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동재,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공간인데 통상 동재가 선배, 서재가 후배들이다. 동재(東齋)는 거경재(居敬齋), 서재(西齋)는 정의재(精義齋)로 불렀다.

그런데 입덕문을 들어서서 강학공간인 강당과 동재, 서재에 이르기 전에 좌우로 건물이 한 동씩 있다. 오른쪽 건물은 경회당으로 현재 관리사무소로 사용 중이며 왼쪽은 응도당(凝道堂)인데 보물 제1569호이다. 1880년 돈암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될 당시 응도당(凝道堂)은 구터에 남아 있다가 1971년에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는데 옮길 때에 '숭정 6년 계유(癸酉)' 명문을 발견하여 인조 11년(1633)의 초창기 건물임을 알 수 있는 정면 5칸·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조선 후기 서원의 문화사적 성격 중 장수강학(藏修講學)의 강당(講堂)으로 보기 드물게 큰 규모와 옛 규제를 충실히 따른 건물이다.

▲입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 경회당이다. 관리사무소로 해설사가 상주한다.
▲입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 경회당이다. 관리사무소로 해설사가 상주한다.
▲그 맞은편, 그러니까 입덕문을 들어서서 왼편이 보물 제1569호 응도당(凝道堂), 돈암서원에서 가장 빼어난 건축물이다. 큼직한 대들보 위에 얹혀 건물이 의젓하며 기둥 위 익공 사이에 화반을 붙여 아름답다. 좌우로는 가첨지붕(눈썹 처마)을 붙였다.
▲그 맞은편, 그러니까 입덕문을 들어서서 왼편이 보물 제1569호 응도당(凝道堂), 돈암서원에서 가장 빼어난 건축물이다. 큼직한 대들보 위에 얹혀 건물이 의젓하며 기둥 위 익공 사이에 화반을 붙여 아름답다. 좌우로는 가첨지붕(눈썹 처마)을 붙였다.

강학공간의 뒤편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중에서 후묘(後廟)에 해당하는 사당 숭례사(崇禮祠)로 김장생과 김집, 송준길, 송시열 4인을 모셨으며 강당인 양성당(養性堂)의 뒤편으로 담을 쌓고 내삼문을 달았는데 평시에는 잠겨있어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다.

▲내삼문 안쪽에 숭례사(崇禮祠)가 있다.
▲내삼문 안쪽에 숭례사(崇禮祠)가 있다.

그런데 내삼문을 가만히 보면 하나의 구조물에 3개의 문이 아니라 각각의 문 3개를 세웠음을 볼 수 있다. 특이하다. 게다가 내삼문을 연하여 쌓은 앞면의 담장은 얼핏 화려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고궁의 꽃담 같다. 그리고 거기에는 각각 4글자씩, 3단어가 씌어있다. 다만 정자체가 아니어서 일반인이 읽기 어렵다.
 
그 글자는 지부해함(地負海涵 :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인데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이 예학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자를 새긴 것이라고 한다.

▲중앙 삼문의 간격에 4글자, 그리고 좌, 우벽면에 각각 4글자씩 12자가 새겨져 있다.
▲중앙 삼문의 간격에 4글자, 그리고 좌, 우벽면에 각각 4글자씩 12자가 새겨져 있다.

사당의 오른쪽으로는 제사준비와 관련한 건물인 전사청이 있고 앞쪽 왼편으로는 서책 등 간행물 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장판각에는 김장생과 아들 김집의 문집과 아버지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적은 기록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전사청.
▲전사청.
▲장판각.
▲장판각.

강당의 왼쪽으로는 정회당(靜會堂)이 있다. 정회(靜會)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 김장생 부친이 강학하던 건물인데 1954년에 대둔산 자락 고운사 터에서 옮겨왔다.

▲정회당.
▲정회당.

 

▲서원 앞에 지어놓은 한옥마을. 찾는 이 없이 한적하다.
▲서원 앞에 지어놓은 한옥마을. 찾는 이 없이 한적하다.
▲현재도 종손이 사는 종갓집, 솟을대문에는 효자 정려가 걸려있다. 집안에는 불천위 사당이, 뒤편에는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도 종손이 사는 종갓집, 솟을대문에는 효자 정려가 걸려있다. 집안에는 불천위 사당이, 뒤편에는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종갓집 뒤편이 광산김씨 일가 묘역으로 김장생을 비롯한 이들의 묘가 자리 잡았다. 김장생의 묘는 가장 위쪽에 곡장을 둘러치고 커다란 비석을 세워 잘 꾸며놓았다.
▲종갓집 뒤편이 광산김씨 일가 묘역으로 김장생을 비롯한 이들의 묘가 자리 잡았다. 김장생의 묘는 가장 위쪽에 곡장을 둘러치고 커다란 비석을 세워 잘 꾸며놓았다.

이렇게 돈암서원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려져 곧 등재될 것으로 보이는 9개 서원을 추가하여 답사하는 중이다. 서원을 나오니 가까운 곳에 사계 김장생 일가의 묘역이 있고 주변 볼거리를 겸하여 걷기 코스 '솔바람 길'이 개설되었다. 나름대로 많은 탐방객이 찾아주면 좋으련만 생각보다 한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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