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비가 많이 내렸고, 오후 네 시에 보기로 한 약속은 길을 찾는데 한 시간 이상이 소모될 만큼 더디고 느려지기만 했다. 이 길로 가 보아도, 저 길로 가 보아도 그가 손수 일군, 버섯을 닮은 집은 멀리서만 부르길 여러 번. 그러다 저녁으로 넘어가는 찰나의 끝에서 버섯집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마주한 그는, 흙과 닮아 있었다.
그토록 그리던 짝을 만나다
장수군 백화산 자락 아래에는 빗속에서도 올곧게 그 산과 땅을 지키고 있는 버섯집이 하나 있다. 산 속 가운데 자리 잡은 동그란 버섯 안에는 올망졸망 탐스럽고 예쁜 네 딸과, 아이들의 든든한 그림자를 자처하는 이필재, 정유생 부부가 살고 있다.
빗길에서 묻은 흙을 탈탈 털어내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알싸한 흙냄새가 집 안 가득 배어 있다. 한옥학교에 다니며 ‘내 집은 내 손으로’라는 철칙을 지킨 이필재씨 부부의 정신이 서려 있기도 한 것처럼 집은 부부를 쏙 빼닮아 있었다. 아담하고 소박한 버섯집 안에는 느리지만 더디지 않은 그네들만의 삶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필재씨는 결혼 전부터 흙 속에서, 흙과 함께 사는 게 꿈이었단다. 남원에서 서예학원을 운영하며 그 꿈을 함께 실현할 아내에 대해 막연히 생각했었다. 주위에도 ‘나는 이런 사람과 결혼하겠다’ 라고 선언하면서 자연과 함께 살려는 꿈을 키워가고 있던 서른일곱의 어느 날, ‘녹색평론독자모임’이란 소모임에서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아내에 대한 첫 인상은 잔잔한 들꽃 같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멈추지 않는 묘한 감정 때문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한 달 동안 매 저녁마다 통화를 하며 서로의 이상과 꿈을 공유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선해준 대상들을 만나보아도, 서로가 생각하는 가치관의 거리는 엄청났는데 이상하게 지금의 아내와는 대화가 술술 통했다. 그러다 서울에서 2명의 아가씨들을 만나본 어느 해 광복절, 결심을 해야겠다 싶어 그 길로 아내가 머물고 있던 대구로 내려갔다. 그게 필재씨가 이루려는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이었다.
자연과 동화되고 싶은 꿈을 이루다
아내는 무주군의 한 대안학교 교사였다. 아내의 꿈 역시 필재씨의 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 그리고 그 꿈을 같이 이루는 이가 곁에 있는 것. 결혼과 동시에 남원에 둥지를 튼 필재씨와 아내는 서예학원을 운영하며 시골집을 빌려 자연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결혼 3년차, 큰 딸 하현이가 3살 되던 해, 갑작스레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통보를 받았다. 그 때 필재씨는, 자신이 생각한 미래를 찬찬히 그려나가려면 ‘내 집’과 ‘내 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단다. 그래서 꿈을 위해 한 보 후퇴를 결심했다.
아내의 고향인 대구에서 도시에서의 삶을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은 둘 중 한 부모가 책임진다는 원칙으로 필재씨가 육아를 하고, 아내가 경제활동을 했다. 그렇게 5년. 아이는 둘에서 셋이 되었고, 막내 현중이는 장수에서 집 짓는 해에 태어났다.
어느 정도 다시 준비가 되었다 생각했을 때, 필재씨는 여섯식구가 한평생을 함께 할 지역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살기 좋은 해발 500-600m지역, 물이 있는 지역을 선정하고 발품을 팔며 살 공간을 찾아다녔다. 때마침 오랜 세월 필재씨에게 서예를 배운 장수토박이 한 분의 소개로 인연이 되어, 필재씨 가족에게 맞는 땅과 농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섯식구는 장수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귀농 8년차인 지금, 필재씨가 바라본 농촌은 어떤 모습일까. “농촌으로 오는 것은, 결국 내가 도시에서 못 살겠다 싶을 때. 그 끝자락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목표의 전부여야 합니다. 소득보다는, 시골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생태적으로 사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요. 귀농을 하고서도, 왜 내가 시골로 왔는지 진짜 이유를 더듬어 생각해보는 게 필요합니다. 후손들에게 어떤 것을 물려줘야 할지도, 어른들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해야겠지요. 스스로의 공동체 삶을 꾸리고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스스로 깨닫는 것, 그것이 진정한 ‘배움’
이필재씨의 네 딸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대신, 필재씨는 세상 곳곳이 배움터라는 것을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게 했다. 20대때부터 홈스쿨링을 계획했다는 이필재씨는 ‘홈스쿨링’이란 개념보다는 ‘홈스테이’개념으로 네 딸을 키운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사회성에 대해 제게 묻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사회성이란 뭐죠? 라고요.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성이란, 경쟁심 속의 패거리(동창,동문 등) 문화가 아닌가요? 사회성이란, 나이에 상관없이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른들의 모임이 이뤄지는 공간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나갑니다. 아이들은 어른도 만나고, 또래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형성해 나갑니다. 저는 그것이 진정한 사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교육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근대 산업 자본주의가 전통 자립적 삶을 파괴하여 (학교 교육이 가장 큰 역할을 함) 임금 노동자를 만들어 유지되듯이, 개인의 행복함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다만 국가가 필요로 하는 한 구성원을 키워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진정한 의미는 가르침과 배우는 행위가 동시에 어루어져 깨달음을 통한 실천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스스로 깨우치는 게 중요하지요.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한 조종은 교육이 아닙니다. 자기 주도적 삶이 아니지요. 자신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주도해야 합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필재씨 집에는 유독 손님이 많이들 찾아온다. 필재씨는 손님이 오지 않으면 그 집은 망하는 거란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것들이 그만큼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손님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 왜 왔는지를 궁금해 하고, 그것들은 얘깃거리가 되면서 공부가 된다. 필재씨는 그러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배움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방식을 ‘길 위의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의 배움은, 유행따라가기나 스펙쌓기로 전향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배움이란 깨달음이어야 하고 깨달으면 실천으로 가야 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삶 속에서 소통이 있어야 하고, 소통은 서로간의 변화를 전제로 해야 진정한 소통이 되고, 배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길 위의 인문학’을 배우며 필재씨의 네 딸은 참 이쁘게도 자랐다. 하현(15세), 우현(13세), 현빈(11세), 현중(8세)이란 이름을 가진 딸들은 학교 밖의 또 다른 배움을 통해 무럭무럭 성장해간다. 그 성장이 진행되는 동안, 필재씨는 우선적으로 아이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부터 가졌으면 했다. 우리 고유의 문화가 아이들 내면에 잘 스며들며 그대로 체화되길 바랐다. 그래서 필재씨 가족은 판소리와 가야금을 5년째 꾸준히 배우고 있다.
사실 큰 아이 둘은, 공교육에 노출이 되긴 했었다. 큰 딸 하현이는 초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 둘째 우현이는 초등학교에 딸린 병설유치원을 다녔었다. 이사 초기, 집을 지으며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으니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경험 후의 선택은 오롯이 아이들 몫이었다. 그렇게 선택한 학교와의 안녕. 스스로 선택했기에 아이들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나머지 두 아이는 학교문턱을 밟아본 적도 없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자연에서 자란 티가 폴폴 나도록 천진난만하기 그지 없다.
지속가능한 삶과 진정한 농사의 조화
농촌에서 흙과 더불어 산 8년의 삶. 필재씨는 농업과 농사는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농업‘이란 것은 말 그대로 사업이고, ’농사‘는 가꾸고 심고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진정한 삶을 지향하려면, 우선적으로 농사를 지어봐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온전한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고 얻어야 할까요? 우리는 그 자연에서 누리기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를 못해서 문제가 생기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에서 알 수 있지요. ‘복 많이 누리세요’ 라는 덕담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아직 어리더라도 스스로 먹을 것은 스스로 뿌리를 심고 수확하게 합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농사의 순리이니까요.”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는 그에게, 어찌 보면 농사는 당연한 거였다. 녹색지구별을 지향하려면 불편함이 있어야만 깨어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필재씨.
“주변에는 편한 것만 있으면 안 됩니다. 불편함에 맞서 감수하고 이기려고 해야지요.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찾아 해야 합니다.”
필재씨에게 농사는 최고의 예술이자 싹을 키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혼자 풀을 베고 있으면 그 자제로도 명상이 되지 않느냐며 배시시 웃는 그에게 농사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천직이 아닐까.
소통과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
유독 장수에는 생태귀농자가 많다. 하지만 생태적인 삶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삶으로 귀향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한 모습들을 곁에서 지켜본 필재씨는 소통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농촌에서는 소통과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전제하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에서의 원하는 삶은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살고 싶습니다. 흘러가는 자본주의는 거역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한 최대한의 답을 찾는다면 시골로 와야 합니다. 또 언행일치가 되지 않으면 어떤 사람에게도 어려운 곳이 농촌이고 농사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책임져야 하지요. 저 역시 늘 공부하는 마음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대부분의 귀농귀촌인들은 농촌으로 오기 전, 많은 고민을 한다. 그렇지만 농촌에 정착하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갈등이 생기면, 첫 마음을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갈등을 정리하면서 살다보면, 어느덧 농촌에 서서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필재씨는 자연이 되기를 꿈꾼다. 농기계를 쓰지 않고, 우리네 선조들의 예전 방식 그대로 그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고 싶단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준비할 것들이 많다고 했다. 첫째,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둘째, 농사짓는 삶의 하루하루의 일이 놀이가 됨을 깨닫고, 셋째, 자연에 반 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흙이 좋아, 흙 속에서 사는 삶을 선택한 필재씨. 조금 더 지나서 다시 우리가 산속 깊은 버섯집을 찾아갔을 때는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지 않으면, 그 누구도 풍족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그의 철학대로 완전한 자연에서, 완전한 자연인으로 만나길 바란다.
“똑같은 배경의 자연을 매년 보면서, 매번 그 자연이 변했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변한 것입니다. 자연은 늘, 거기 그대로 있는 것 뿐입니다. 삶은, 복을 받느냐와 누리느냐의 차이입니다. 내 안이 아닌 곳에서 자꾸 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자료제공·전라북도 귀농귀촌 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