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풀, 나무, 개미, 아이들이 거기에 있다

비가 내린 운동장은 피부가 하얗다. 모래 사이에 배어든 물이 투명하다. 어제의 꺼끌꺼끌했던 땅의 피부가 부드러워졌다. 이런 날은 고요하다. 모래 운동장이 소리도 없이 깊숙이 가을을 앓는다.

철봉은 투명한 알통이 토실토실하게 차온다. 모래 운동장이 여인의 피부처럼 부드럽게 변해도, 철봉은 비록 철철철 녹비를 흘릴지언정 그 강인한 뼈대 있는 근성은 거침이 없게 가을비에 맞선다. 철봉과 손아귀 사이에 빗물이 미끈거린다.

벌써 넝쿨은 잎사귀가 금빛으로 변해 간다. 다른 초목과는 달리 날씨가 민감하게 담겨지는 거울 같은 나무다. 이웃 나무들은 아직도 푸른 제복 같은 옷을 입고 여전히 여름을 추억하고 있고, 가지런히 바윗돌이 빙 둘러 놓인 나무를 감싼 잔디에도 여전히 새파란 가는 손가락에 방금 끼워진 다이아몬드같이 빗방울이 풀잎 여기저기에 방울져 있다.

친구 같은 철봉은 말이 없이 두 손을 받아 준다. 근육의 다발이 맑은 날 구름처럼 뭉쳤다 풀어졌다는 반복한다. 푸근히 몸을 녹이기에는 빗방울 작아도 만만하지는 않다. 뻣뻣한 근육을 긴장시키며 산소도 마시며 체중을 지구력 있게 철봉의 예를 익힌다.

턱걸이는 철봉 세계의 자장면이고, 스파게티다. 철봉도 근성으로는 기다란 게 스파게티 같고, 자장면 면발 같다. 불속의 그 면발처럼 철봉도 불에 달구면 더 길고 가늘게 여의봉처럼 되는 속성이 다를 게 없다. 팔도 근육의 다발이고, 지구의 중력에 의해 적당한 자극을 가하면 근육도 면발 같다.

우연히 알게 된 머슬 업도 있다. 진자처럼 흔들리다 무게 중심을 변화시켜 철봉 위로 상체를 올려놓는 기술이다. 꾼들이 하는 것을 보면 꼭 될 거 같다. 해보면 그게 아니다. 시늉 몇 번에 뱃속의 기합이 울려 나오다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꺼질 정도로 기운이 빠진다. 작은 빗방울이 대지를 적시는 이 계절에 아직도 과한 몸으로 근육의 스파게티를 뻗어 하늘의 별만큼 높은 제일 높은 철봉에 매달려 본다. 흔들흔들 흔드니 머슬 업은커녕 근육이 반죽이 시원찮은 듯 주욱 늘어지고 끊어질 듯하다.

어김없이 시계는 돌아간다. 인연법에 따라 허공 속에 모든 게 모였다 흩어진다. 터벅터벅, 빗방울 속에서 대지를 걸으며 나도 그곳에서 흩어진다. 아득한 추억 하나가 거미줄처럼 발바닥에 다가온다. 비 온 날의 모래 운동장은 가만히 걸어보면 여성의 피부같이 보드랍다. 풀들이, 나무들이, 개미들이, 아이들이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