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를 그린 영화

1932년 8월 28일, 뉴욕, 밤 9시. 낡은 피아노 앞에 비스듬히 앉은 여자가 권태롭게 틱, 틱, 건반을 눌렀다. 조끼를 단정하게 받쳐 입은 남자가 두어 걸음 떨어진 소파에 앉으며 신문을 펼쳤다. 연두색 벽, 자줏빛 소파, 오렌지색 드레스와 붉은 머리칼, 멀어져가는 자동차 경적 소리. 여자는 창문을 열며 생각한다. "현실은 이미 충분히 잔혹해. 내가 떠나는 게 그이 잘못은 아니야."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그림 13점을 스크린 위에 소환해 생명을 불어 넣은 듯한 영화다. 호퍼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상실감과 고독의 정서를 무표정하게 담아낸 그림들로 널리 알려진 미국 사실주의 화가. 그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걸 눈앞에서 보는 것은 무척 낯설고 황홀한 경험이다.

화가와 그림에 관한 영화 5편이 관객들을 만난다.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의 예술영화상영관 필름포럼에서 18일부터 5일간 열리는 '그림 그리는 영화' 기획전이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그의 아들 장 르누아르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르느와르'(2012), 에두아르드 마네와 여류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사랑을 다룬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2012)도 인상파 화가들의 화려한 빛을 스크린에 되살려낸다. '뮤지엄 아워스'(2012)는 르네상스기 플랑드르 화가들의 그림을 소재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고, 미술 경매 시장의 어두운 뒷모습을 담은 '베스트 오퍼'(2013)는 뒤러, 라파엘, 티치아노, 모딜리아니의 명화들로 가득하다. 19일에는 '뮤지엄 아워스 속 그림 이야기'를 주제로 윤운중 미술평론가가 관객과 만나는 씨네 토크도 있다. (02)743-2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