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9.18 04:00

다방, 영화의 한 장면이 되다

12일 강원도 영월 시내의 한낮, 한 관광객이 ‘청록다방’에 앉아 쌍화차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12일 강원도 영월 시내의 한낮, 한 관광객이 ‘청록다방’에 앉아 쌍화차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영화 ‘라디오스타’ 촬영지였던 다방 곳곳에 주연 배우의 사진과 사인이 빼곡하다. /영월=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기껏해야 동강이나 단종 임금, 김삿갓 정도를 떠올릴 법한 강원도 영월에도 예사롭지 않은 다방 하나가 있다. 청록다방이다. 1층에 떡하니 있는데, 배달 가기 좋게 생겼다. 66㎡(20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 5개가 전부지만, 사방의 벽이 영화배우 박중훈과 안성기로 가득하다. 2006년 개봉한 영화 '라디오 스타'의 촬영지였다. 서류상으로 1970년에 문을 연 이곳이 영월의 명소가 된 것도 이때부터다. 소문을 듣고 찾은 최불암, 정형돈 등 배우·개그맨의 사진·사인도 빼곡하다. 박중훈과 안성기가 자주 마셨다는 노른자 띄운 쌍화차가 제일 잘 나간다.

영화가 다방을 찾는 건, 훼손되지 않은 옛날의 공기 때문일 것. 벽돌 색깔만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2층 건물인데, 원래 여관이었던 2층은 마담과 아가씨들의 숙소로 쓰인다. 지금 일하는 '아가씨'(?) 세 명 모두 나이 마흔을 넘겼다. 청록다방, 이전엔 돌샘다방이었다 하는데 오리 같기도 하고 고색창연한 조각상의 느낌도 나는 이름이라 하겠다. 영화에 다방 마담으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한 주인 김정애(54)씨가 "원래 영화 시나리오상으론 '터미널 다방'이었지만, 다방 이름이 예뻐 그냥 본래 이름으로 영화에도 나오게 됐다"고 한다.

청록다방은 영월 시내 맞선의 메카였다. 당시 선본 남녀들이 중년의 부부가 돼 찾아오기도 한다. 인조 가죽 '레자'로 된 붉은 소파에 군데군데 기운 흔적이 있다. 2001년부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김씨가 "낡아도 좋으니 바꾸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고 덧붙인다. 영화 속 그녀는 차 한 잔 시켜놓고 온종일 죽치는 안성기가 미워, 공연히 김양에게 "배달 가라"고 쏘아붙인다. 현실에선 차 한 잔 놓고 옆문 너머 단종의 광풍헌을 온종일 바라봐도 절대 내쫓지 않는다.

청록다방 외관. 한때 여관이었던 2층은 현재 다방 직원들의 숙소로 쓰인다.
청록다방 외관. 한때 여관이었던 2층은 현재 다방 직원들의 숙소로 쓰인다. /영월=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경남 진해에 있는 문화공간 '흑백'
대체로 과거는 흑백으로 기억되는 모양. 경남 진해에 있는 문화공간 '흑백'도 그렇다. 1955년 흑백다방으로 시작했지만, 벽면에 가득한 그림과 수백 장의 클래식 음반이 보여주듯, 2년 전부턴 모카 커피와 피아노 선율이 공존하는 문화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2012년 영화 '화차'에 이 흑백의 흑백 실루엣이 등장한다. 주인공 이선균이 창문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과 다방의 그늘이 만들어낸 흑백 안에 갇힌 장면이다. 김소영 감독의 '거류' 등 단편 영화에도 여럿 등장했다. 흑백다방을 연 서양화가 고(故) 유택렬씨의 딸 피아니스트 유경아(49)씨는 "감독이 흑백의 창을 좋아했다. 이곳을 찾은 건축가들도 특히 창문이 아름답다 한다"고 말한다.

매주 토요일 오후 5시에 음악회를 연다. 1년 중 가장 큰 행사는 9월 마지막 토요일에 열린다. 올해는 베토벤 연주회다. 고인이 된 유씨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한 음악가라 한다. 객석은 40여개로 소규모지만, 입석을 마다치 않는 관객이라면 들인다. 흑백이 입주한 100년 묵은 이 2층 건물은 지난해 경남 근대건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화가 이중섭·전혁림, 작곡가 윤이상, 시인 서정주 등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예술 좀 한다는 이들이 계속 찾아온다. 정일근 시인도 시 '흑백다방'에서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다방이여"라고 고백한다. 이상하기도 하지, 다방에만 오면 흰 종이에 뭔가를 자꾸 쓰고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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