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수박! 네 속이 알고 싶다

아파트 옥상의 상자 텃밭에 수박이 달렸다. 달덩이 같은 수박이 아니라 타원형의 수박이다. 푸른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교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손으로 튀기면 튀어 올라올 것 같이 탱탱하다. 그래서일까 내리는 빗방울들이 수박에 닿는가 싶으면 ‘쪼로록’ 굴러떨어지고 만다. 수박 이파리에 숨어 다른 어떤 손길도 부드럽고 은밀하게 거부하는 모양새가 오만하기까지 하다.

나는 과일 중에 수박이 제일 좋다. 그렇다고 수박 농사를 지어 본 것도 아니다. 6월쯤인가? 수박을 사 먹고 나서 하도 달기에 수박씨 몇 알을 아파트 옥상에 가지고 올라갔다. 설마 제가 싹이 날까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추나무 옆에 심었다. 그 혹시나 가 어느 날 싹이 돋더니 줄기를 뻗기 시작했다. 좋아라 가지가 잘 뻗도록 작은 나뭇가지로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걸 보던 내 농사 스승님은 ‘수박은 순치기를 해야 혀. 아들 줄기에서 열 마디 정도 되는 곳에 열매를 키워야 해. 손자 가지는 다 따 버리는 거여.’ 하고는 또 휙 하니 내려가 버리셨다.

아버지 가지는 뭐고 아들 가지는 뭔가? 아리송하기만 하다. 가르침을 주셨으니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 수박 잎 사이를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얼뜨기 도시 농부의 눈으로는 얽히고설켜 있는 수박 줄기에서 아들가지 손자가지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방목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설마 수박까지야 안 달리겠지 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수박이 달렸다. 것 두 한 개가 아니고 무려 여섯 개가 달렸다.

처음에 두 개를 발견 한 날 환성을 올렸다. 이 소식은 내가 사는 아파트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4층 할머니가 올라오셔서 살다가 아파트 옥상에 수박 자라는 것도 본다며 내려가시고 나니 7층 꼬마들이 올라와 만져보고 쓰다듬는 등 아파트에 새 소식으로 등극했다. 그렇게 소동을 치르고 얼마 후, 어느 날 수박 이파리에 두 개가 더 숨어 있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른 때보다 일찍 계절이 시작되더니 폭염도 일찍 물러났다. 아침저녁으론 서늘한 기운까지 느껴지니 저 수박이 과연 익을까 싶다. 벌써부터 라디오나 TV에서는 가을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오늘은 수박을 들여다보다가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온도를 좀 더 높여주니 수박이 잘 자라 여물 것 같은데.....

수박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중후한 느낌이 든다. 아직 어린수박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점잖고 교양 있어 보인다. 그 중후하고 점잖고 교양 있어 보이는 외모는 칼로 반을 ‘탁’하고 자르는 그 순간 빨갛고 부드러운 속살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반전이다. 사람들을 유혹하여 침이 꼴깍 넘어가게 만든다. 재빨리 한 입 베어 넣으면 눈은 저절로 스르륵 감기며 한순간에 그 유혹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수박 한 조각을 들고 앉으면 세상 근심은 다 날아가고 얼굴엔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붉고 연한 속살은 화려하지도 않고 유혹적이지도 않은 부드러운 열정적이다. 안으로 감추어진 그 모습은 천진함마저 느끼게 하며 눈을 즐겁게 한다. 씹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고, 입으로부터 코로 전해지는 향기는 코를 즐겁게 한다. 촉감으로는 중후한 느낌이요, 미각으로는 상큼하니 수박만큼 오감을 자극하는 과일은 없다. 그러니 수박 앞에선 미소가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수박은 여름 과일 중의 왕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원두막이란 것이 있었다. 수박이나 참외밭에 세워두는 작은 정자 같은 집이다. 일이 미터쯤 되는 높이에 네 기둥을 세우고 풀이나 볏단을 얹어 한여름 수박밭이나 참외밭을 지키는 일종의 망루다. 그 원두막에 앉아 가끔 나타나는 동네 아이들의 수박 서리를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박을 따는 개구쟁이 녀석들을 잡는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소리 지르며 겁을 주어 쫓는 역할을 했었던 걸로 기억된다. 다른 밭에는 없었었으니 그만큼 수박은 여름의 과일 중의 왕이었기 때문이라 생각 한다.

수박이 자라는 속도가 늦어졌다. 아마도 수박이 제법 크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지 싶다. 그나저나 저 수박은 언제쯤 익을까? 참외는 는 노랗게 되면 익은 거고, 토마토는 붉어지면 익는 거란 것은 안다. 그런데 수박은 어떻게 익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자라는 수박을 찔러 볼 수도 없고 수박 장수처럼 ‘통통’ 두드려 익은 것을 가려낼 재주도 없으니 고민 중의 고민이다. 사람 마음속같이 깊은 저 수박 속을 어찌 알아낸담. 고민 중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