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이걸 보고도… K팝 씹고 뜯을 수 있을까

식상하지 않는가. 데뷔를 앞둔 걸그룹, '스타 되기'에 목숨 건 어여쁜 소녀들. 이들을 으르고 윽박지르고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거듭해 '물건' 만드는 기획사 이야기라니. 그러나 25일 개봉하는 '나인 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민치앤필름 공동제작)이 만약 '누구나 대충 상상할 법한 연예계 뒷얘기'에 머물렀다면,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이 영화를 놓고 "K팝 현상의 지속 프로세스에 관해 거의 완벽한 통찰을 제공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 빌보드닷컴은 "K팝을 혐오하는 음악 팬들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을 경이로운 다큐멘터리"라고도 했다.

영화는 이 걸그룹이 데뷔곡 '노, 플레이보이'로 첫 무대에 서기 전인 2010년 초부터, 두 번째 싱글 '레이디스'를 내놓기까지 1년여를 담았다. 감독은 탈북자들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으며 완성한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의 이학준. 로드 매니저처럼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붙으며 찍고 또 찍었고, 1년 넘게 편집과 후반 작업을 거쳐 이 82분짜리 다큐를 완성했다.

"내가 지금까지 뭐했나. 내 거 버리고 가족 희생시켜가며 이 일을 왜 했을까…. 그러고도 다음 날 회사에 3시간 일찍 가 연습하는 거예요. 이 일이 그래요. 뭔가 족쇄임과 동시에 뭔가 나를 탈출시키는 그런…." 데뷔 전 팀의 리더였던 세라는 "얼마 전 휴대폰 끄고 도망쳤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혹평받은 데뷔 무대 뒤 포털뉴스 댓글을 인쇄해 손에 든 기획사 간부들은 밤늦도록 멤버들을 닦달한다. "이런 그룹 하나 만들려면 10억은 든다"는 기획사 사장은 상의 없이 잠적한 멤버, 연습을 게을리한 멤버들을 단칼에 잘라낸다. "잘 거 다 자고 할 거 다 하고 스타 되면 불공평하지. 자신 없으면 빨리 관두는 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아."

노래 홍보를 위해 직업 체험 프로그램에 나가 고구마를 캐던 한 멤버는 "빨리 떠서 저 혼자 다니는 게 꿈"이라고 하고, 춤 때문에 구박받던 다른 멤버는 "진통제 맞으면서 하라는데, 안무 쌤한테 말도 못 꺼내겠다"며 또 눈물짓는다.

'모델돌', '군인돌'로 불리는 늘씬한 그룹인데도, 카메라는 여성의 몸을 훑어내리는 익숙한 시점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대신 멤버들에게 왕따당해 펑펑 울고 난 뒤에도 힘차게 춤을 추고, 고열로 쓰러져 링거를 맞고서도 자로 잰 듯 상업적 미소를 짓는 이들을 여과 없이 담는다. 군대 위문공연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는 풍경은 차라리 서글플 정도다.

이학준 감독은 "처음 시작 땐 '매니저는 가해자, 스타 지망생은 희생자'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이들을 보며 아이돌 산업이란 결국 아이들과 어른들의 서로 다른 욕망이 뒤엉킨 불구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K팝은 젊고 아름다운 청춘들이 기꺼이 투여하는 피땀을 빨아들이며 자랐다. 대중은 앞으로도 이 청춘들을 씹고, 맛보고, 즐길 것이다. '그 정성으로 공부를 하지, 쯧쯧' 하며 빈정대고픈 '꼰대'는 접근 금지. 젊음을 삼키는 욕망의 소용돌이, 그 화장기 없는 민낯을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이 영화는 꽤 괜찮은 선택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IDFA) 경쟁부문에 초청된 것을 비롯, 캐나다 밴쿠버, 미국 뉴욕, 중국 상하이 등 총 12개 국제영화제에 나가 호평받았다. 지난해 2월엔 영국 BBC가 47분 길이로 재편집해 방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