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9.22 10:54

필암서원(筆巖書院)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사적 제242호)

필암서원은 뛰어난 학식 때문에 호남의 유종(儒宗)이란 칭송을 듣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를 모신 곳이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卞成溫)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웠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1624년(인조 4) 복원되었으며 1662년(현종 3) '필암(筆巖)'으로 사액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필암서원 입구의 주변 정리 기념비. 이런 것이 필요한지 의문이다.
▲필암서원 입구의 주변 정리 기념비. 이런 것이 필요한지 의문이다.
1786년에는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梁子徵)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이 서원에 소장된 문서들은 보물 587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는데 총 15책 65장의 필사본들로 고문서류이다. 이 자료들은 필암서원의 임원, 원생, 조선 후기 서원의 재정과 노비 소유, 서원의 운영사항과 지방관청 및 유림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전남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존치된 서원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호남지역의 유일한 서원이다. 또한 필암서원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는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 중 유일한 호남사람으로 호남지역민들이 이를 대단한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자랑거리이다. 즉, 필암서원은 호남의 대표서원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필암서원 전경. 아담한 느낌이나 홍살문이 좀 작다는 느낌이다. 은행나무가 앞마당에 우뚝 서 있다.
▲필암서원 전경. 아담한 느낌이나 홍살문이 좀 작다는 느낌이다. 은행나무가 앞마당에 우뚝 서 있다.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나 김안국의 제자로 수학하였으며, 후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이 되어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으며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였으며,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하서집》, 〈주역관상편〉 등이 있다. 정조는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였다. 인촌 김성수가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가 아니라 하마석(下馬石)이 있다. 말에서 내릴 때 밟는 디딤돌이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가 아니라 하마석(下馬石)이 있다. 말에서 내릴 때 밟는 디딤돌이다.
하서 김인후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는데 인종은 어진 성품과 뛰어난 학식을 갖춰 명군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1545년 즉위 8개월 만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病死)하였고, 인종의 이복동생 명종이 보위에 올라 하서를 등용하려 했으나, 인종이 승하한 뒤 정치에 뜻을 접은 하서는 벼슬을 탐내지 않고 고향 장성에 칩거하며 후학 양성에만 매진하였다.

필암서원에는 하서와 세자 시절의 인종이 얼마나 막역한 사이였는지 보여주는 유물이 많다. 인종이 직접 그려 스승인 하서에게 줬다는 그림 묵죽도(墨竹圖)와 인종 승하 후 하서가 그를 ‘님’에 비유해 쓴 시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인종이 하사한 그림 ‘묵죽도(墨竹圖)’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경장각(敬藏閣) 건물 현판의 흘림체 글씨는 정조가 직접 쓴 것이다.

▲필암서원도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이다. 다만 강학 공간의 강당이 앞쪽에 배치된 U자 형태인 점이 특이하다. 우동사 우측의 장서각이 현재는 없고, 그 자리에 협문이 있다.
▲필암서원도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이다. 다만 강학 공간의 강당이 앞쪽에 배치된 U자 형태인 점이 특이하다. 우동사 우측의 장서각이 현재는 없고, 그 자리에 협문이 있다.
필암서원은 호남의 자랑이자 장성의 자랑이어서인지 주변 정리도 잘 되어있고 서원 옆에 유물관도 잘 지어놓았다. 다만 돈암서원에서처럼 준비된 설명자료 등이 없었으며, 배치된 해설사도 없어서 방문객이 돌아보고 이해하는데 많이 아쉬웠다.

▲서원의 대문이자 원생들의 휴식처인 누각 '확연루(廓然樓)', 팔작지붕을 얹어 품위를 더한 의젓한 모습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2층 누각으로 아래층 3개의 출입문과 위층 3개의 널문을 모두 열어젖힐수 있다.
▲서원의 대문이자 원생들의 휴식처인 누각 '확연루(廓然樓)', 팔작지붕을 얹어 품위를 더한 의젓한 모습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2층 누각으로 아래층 3개의 출입문과 위층 3개의 널문을 모두 열어젖힐수 있다.
▲확연루(廓然樓)는 김인후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확 트여있고 공정하다는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따왔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으며, 누각의 전면과 2층 안쪽에도 현판이 걸려있다.
▲확연루(廓然樓)는 김인후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확 트여있고 공정하다는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따왔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으며, 누각의 전면과 2층 안쪽에도 현판이 걸려있다.

누각 아래층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서면 담으로 둘러쌓인 네모진 공간이고, 눈앞에는 길다란 건물이 보인다. 강학당인 청절당(淸節堂)이다. 대부분의 서원은 강학 공간에서 강당을 뒤쪽에 두고 있으나 필암서원은 앞쪽에 놓아 막힌느낌이다. 정면에서 보이는 모습은 강당의 뒷면인 셈이며, 출입은 왼쪽에 달린 협문으로 드나들게 되어있다.

▲서원의 강당인 청절당(淸節堂), 유생들이 공부하거나 회의 등 모임을 하는 공간의 뒷면이다. 왼쪽 협문으로 들어간다.
▲서원의 강당인 청절당(淸節堂), 유생들이 공부하거나 회의 등 모임을 하는 공간의 뒷면이다. 왼쪽 협문으로 들어간다.
▲협문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앞면을 볼수 있다.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은 대청이며 좌우로 단칸 온돌방을 들인 구조이다. 옛 진원현의 객사 건물을 옮겨 지었다고 하며,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청절당(淸節堂)' 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협문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앞면을 볼수 있다.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은 대청이며 좌우로 단칸 온돌방을 들인 구조이다. 옛 진원현의 객사 건물을 옮겨 지었다고 하며,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청절당(淸節堂)' 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필암서원(筆巖書院)' 현판은 학자 윤봉구가 썼으며, '청절당(淸節堂)'은 송시열이 쓴 김인후 신도비의 '청풍대절(淸風大節)'에서 따온 말로 송준길이 썼다. 節(절)자를 불균형하게 쓴 것이 눈길을 끈다.
▲'필암서원(筆巖書院)' 현판은 학자 윤봉구가 썼으며, '청절당(淸節堂)'은 송시열이 쓴 김인후 신도비의 '청풍대절(淸風大節)'에서 따온 말로 송준길이 썼다. 節(절)자를 불균형하게 쓴 것이 눈길을 끈다.
▲청절당 대청마루에 올라서니 오른편에는 오늘날 교훈(校訓)을 걸어놓듯이 백록동(白鹿洞) 서원의 학규를 걸어놓았다.
▲청절당 대청마루에 올라서니 오른편에는 오늘날 교훈(校訓)을 걸어놓듯이 백록동(白鹿洞) 서원의 학규를 걸어놓았다.
▲앞마당에는 좌우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이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진덕재(進德齋), 숭의재(崇義齋)라는 현판은 송준길이 썼다.
▲앞마당에는 좌우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이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진덕재(進德齋), 숭의재(崇義齋)라는 현판은 송준길이 썼다.
▲강당 왼편의 작은 집은 뒷간이다. 측간이라고도 하는데 '정방(瀞房)'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강당 왼편의 작은 집은 뒷간이다. 측간이라고도 하는데 '정방(瀞房)'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렇게 강학 공간은 강당인 청절당과 유생들 공간인 동재와 서재로 되어있다. 청절당에서 바라보면 정면에 사당이 보인다. 대부분 이 장면에서 정면이 강당이고 그 너머로 사당지붕이 보이는데 필암서원은 강당을 앞에 두다보니 사당이 바로 전면에 보인다. 사당은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고, 내삼문이 중앙에 보인다. 그 앞으로는 오른쪽에 비석, 왼쪽에 경장각이 있다. 사당의 서쪽에는 전사청, 동쪽에는 장판각등이 있는 구조이다.

▲청절당에서 바라본 모습.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담장이 보이고 碑(비)가 서있으며, 왼쪽의 작은 건물은 경장각이다.
▲청절당에서 바라본 모습.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담장이 보이고 碑(비)가 서있으며, 왼쪽의 작은 건물은 경장각이다.
▲김인후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을 배향한 사당 우동사(祐東祠), 내삼문 외에 우측으로 협문이 있다.
▲김인후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을 배향한 사당 우동사(祐東祠), 내삼문 외에 우측으로 협문이 있다.
▲사당의 왼편, 경장각 뒤에 가려져 잘 안 보이는 곳에 협소하나마 전사청을 마련하여 제사관련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다.
▲사당의 왼편, 경장각 뒤에 가려져 잘 안 보이는 곳에 협소하나마 전사청을 마련하여 제사관련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다.
▲사당 앞에 선 비석은 계생비(繫牲碑), 묘정비(廟庭碑)이다. 계생비는 사당에 제사를 지낼때 제물로 쓰일 가축을 매어놓는 비석이며,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취지와 연혁, 모셔진 인물등을 기록하여 서원비(書院碑)라고도 부른다.
▲사당 앞에 선 비석은 계생비(繫牲碑), 묘정비(廟庭碑)이다. 계생비는 사당에 제사를 지낼때 제물로 쓰일 가축을 매어놓는 비석이며,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취지와 연혁, 모셔진 인물등을 기록하여 서원비(書院碑)라고도 부른다.
▲사당 왼쪽의 작은 건물은 경장각(敬藏閣)이다. 정조 임금이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세우도록 내탕금을 내려보내 지었다고 하며, 현판은 정조의 친필로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망을 쳤다. 안에는 인종이 하사한 그림과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사당 왼쪽의 작은 건물은 경장각(敬藏閣)이다. 정조 임금이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세우도록 내탕금을 내려보내 지었다고 하며, 현판은 정조의 친필로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망을 쳤다. 안에는 인종이 하사한 그림과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사당의 동쪽, 즉 오른편에는 장판각과 한장사 2동의 건물이 있다. 김인후 선생의 문집 목판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의 동쪽, 즉 오른편에는 장판각과 한장사 2동의 건물이 있다. 김인후 선생의 문집 목판등이 보관되어 있다.
필암서원의 대강을 둘러보았다. 호남 유일, 호남 제일의 서원답게 역사와 무게가 느껴지는 분위기로 잘 지어진 구조임을 알 수 있었다. 서원 밖에는 역사유물관을 별도로 지어놓아 김인후 선생에 대한 관련자료와 함께 상세한 설명을 볼 수 있었다. 방문객이 별로 없는지 한산한 모습이었으며, 무인판매대로 입장료 5백 원이었는데 잔돈이 비치되어 있지 않아 넣지 못해 죄송하다.

▲필암서원 부설 역사유물관.
▲필암서원 부설 역사유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