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쓰레기' 취급 받았지만… 내가 모은 작품들엔 역사가 담겼죠

"제가 처음 이우환 작품을 기증했을 때 그걸 '쓰레기'라고 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작품 값이 얼마로 뛰었다며 자랑하더군요. 피카소와 샤갈 작품을 기증할 때도 제일 먼저 들은 말이 '얼마짜리냐'였어요."

수천억원에 달하는 미술 작품 1만점을 기증한 남자. 재일(在日) 한국인 미술 컬렉터 하정웅(75·사진)씨에게는 늘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50년 동안 1만점을 수집했고, 모두 한국의 미술관에 기증했다. 자전적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메디치미디어)을 출간한 그는 22일 간담회에서 "처음엔 '재일교포가 돈 자랑한다, 숫자만 많지 전부 쓰레기 같은 그림들이다' 같은 비난도 있었다. 이우환 작품까지 쓰레기라고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태도가 달라졌다. 작품의 가치는 값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씁쓸해했다.

하씨는 1939년 일본에서 한국인 2세로 태어났다. 일본 동북부 아키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화가를 꿈꿨지만 가난으로 꿈을 접었다. 가전 판매점으로 사업 기반을 닦은 그는 재일교포인 고(故) 전화황 화백의 '미륵보살' 그림에 반해 수집을 시작했다. "25세 때 화랑에 걸린 그림을 본 순간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지요. 한없이 온화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미륵보살이 기도 중이었어요. 곧바로 그림을 샀습니다."

그날 이후 50년 컬렉션 여정을 그는 '확장의 여정'이라고 했다. 재일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에서 시작해 한국 작가, 일본 작가, 전 세계 작가로 차츰 넓혀갔다. 하씨는 "미술 작품에서 조국을 배웠다. 특히 재일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은 내 삶은 물론 재일 한국인 전체의 역사가 투영된 거대한 자화상"이라며 "내 컬렉션은 기억의 유산이고 기도의 미술"이라고 했다.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오른 이우환을 먼저 알아본 이도 그였다. 1980년 일본 미술잡지에 소개된 그의 작품에 매료됐다. "커다란 돌이 덩그러니 놓인 설치작품을 보자마자 어린 시절 집 뒤에 있던 무연고 무덤이 떠올랐어요. 돌 하나만 서 있던 무덤. 어머니는 조선인들이 묻힌 무덤이라면서 경건하게 절을 올리라고 했었죠." 이후 수집한 이우환 작품 42점을 모두 한국에 기증했다. 그는 "이우환 작품뿐 아니라 지난 50년간 모은 미술품을 단 한 점도 팔지 않았다. 기증을 목적으로 수집했기 때문에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가 지난 20년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만 2300점이 넘는다. 하씨는 "광주시립미술관 내에 하정웅미술관을 별도로 건립할 예정이라는 전화를 받았다"며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내 생애 남은 시간도 열심히 수집하고 기증하겠다"고 했다. 책에는 강제 징용으로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죽은 재일 한국인 6000명의 명단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고군분투한 일화도 생생하게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