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여기, 영화는 있다

"야, 담배 꺼! 하여튼 망조(亡兆)가 들어서 새파란 기집×이 어디 담배를!"

서울 낙원상가 4층에서 예비군복 차림 노인이 '삑' 호각을 불며 달려가 젊은 여성에게 욕을 퍼붓는다. "언제 봤다고 욕이세요!"(여자) "이거 코트도 빨간 게, 빨갱이× 아냐? 내가 니 같은 × 지킬라고 전쟁 나간 줄 아냐!"(노인) "왜 이래 정말! 내가 언제 지켜달래요?"(여자)

큭큭 웃음이 터진다. 주변 누군가는 겪었을 듯한 막무가내 노인과 봉변 당하는 여자. 그런데 이 노인과 여자,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와 여배우 하라 세쓰코 이야기로 마음을 트더니,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훈훈하게 맞담배를 피운다. 24~27일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에서 열리는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된 단편영화 '낙원동' 이다.

올해 7회째를 맞는 서울 노인영화제가 확 바뀌었다. 단편은 풍성하고 해외 화제작도 줄을 섰다. '노인들이 만든 학예회 같은 단편들이겠지' 하는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진다. 송승민(42) 사무국장은 "작년에도 오전 10시부터 밤늦게까지 상영하며 남녀노소 매진 행렬이 이어졌다"며 자신만만하다. 노인영화제의 재발견이다.

◇'쏠쏠한 재미' 단편 38편

단편 경쟁 부문엔 젊은 영화인들의 웰메이드 단편부터 패기만만 어르신들 작품까지 총 38편이 관객 평가를 기다린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가스통 할배들'로 폄하돼온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노인들 모습을 치우침 없이 담담하게 들여다본다. 욕하고 불 지르는 막무가내 시위꾼인 동시에, 장기도 두고 손자 걱정도 하는 평범한 할아버지들이다. 세대 간 불통의 상징이 된 지하철 에피소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와 함께 묘한 대구를 이룬다. 부산영화제 한국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출신인 김수현(37) 프로그래머가 "노인 영화계 블록버스터"라고 칭찬하는 '까칠이와 더펄이', 텃밭 가꾸는 노인 부부의 소소한 일상을 관찰하는 '티격태격 알콩달콩' 등은 보노라면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진다.

◇노년의 고독과 고통 직시

'동행'과 '일등급이다'는 노인요양병원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동행'은 같은 요양병원 병상에 누워 6년을 지냈지만 남녀 병동으로 나뉘어 서로 만나지 못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 부부 1실을 쓰는 데 드는 월 200만원을 자식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휠체어 타고 할머니에게 가는 할아버지의 여정은 아득하고, 곧 사그라질 듯한 목소리로 "그만 집에 가자"며 할머니 손을 잡을 땐 내 부모인 듯 가슴이 아리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주단 가게에서 평생 한복을 지어 자식을 기른 할머니와 가족 이야기. 은은한 듯 화려한 주단, 한옥 골목의 석양 등 섬세한 미장센과 감정 표현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논바닥 뮤지컬'을 아시나요

'대단한 단편들' 부문에는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 '탕웨이의 남자' 김태용 감독, 배우 정우성이 만든 단편들이 포진했다. '일본과의 만남' 부문에선 일본 홋카이도의 농촌 노인들이 전문 영화인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뒤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받았던 '논바닥 뮤지컬' 등이 상영된다. '마스터 클래스'는 한국화 화폭처럼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안재훈 감독 차지다. 미국, 호주, 남미에서 온 해외 초청작들도 다채롭다. 홈페이지 hsisff.seoulnoin.or.kr (02)6911-9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