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 낮춘 일임형 랩(wrap·종합 자산관리 계좌), 소액 고객 늘며 71兆 규모로

서울 창동에 사는 직장인 이서현(34)씨는 얼마 전 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한 증권사의 주가연계증권(ELS)랩에 가입했다. ELS에 한 번에 많은 금액을 넣기가 부담스러워 투자를 망설였는데 이 상품은 한 달에 10만원씩 적립식으로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증권사에서 매주 출시하는 수많은 ELS 중에서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스스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수억원대의 자산가들이 주 고객이었던 일임형 랩에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수천만원을 맡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자문형 랩에 묻혀 힘을 못 쓰던 일임형 랩이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일임형 랩에 1억원 미만 맡기는 투자자 늘어

랩 어카운트(wrap account)는 고객이 맡긴 돈을 증권사에서 주식·채권·펀드·파생상품 등 여러 자산에 투자하고 관리해주는 종합 자산 관리 계좌다. 일임형과 자문형이 있는데, 투자자문사가 추천하는 종목을 증권사가 편입해 운용하는 자문형 랩과 달리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일임형 랩은 증권사 본사나 영업점에서 직접 운용한다.

일임형 랩 잔고는 지난 2011년까지 50조원을 밑돌았지만 올해 7월 말 71조원으로 증가했다. 돈을 맡긴 고객 수는 91만명에서 106만명으로 늘었다.

최근에는 1억원 미만을 맡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KDB대우증권은 작년 9월 이후 1억원 미만 투자 계약 건수가 26만6031건에서 30만7657건으로 15.6%(4만1626건) 증가했다. 한 계좌당 평균 투자 금액은 530만원에서 425만원으로 줄었다.

신한금융투자와 우리투자증권도 1억원 미만 계약 건수가 각각 1만8000건(24.6%), 1만5000건(17.4%)씩 늘었다. 평균 투자 금액은 각각 500만원, 900만원 정도다. 대신증권은 702건에 불과했던 계약 건수가 올해 1000건을 넘었다. 9개월간 42.7% 증가했다.

유동훈 대신증권 랩운용부 팀장은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추천하는 소수의 종목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때문에 수익률이 좋은 편"이라면서 "자문형 랩과는 다르게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통해 어떤 주식이 언제 얼마나 거래되는지 투자자들이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 반응이 좋다"고 설명했다.

◇문턱은 낮아지고 상품은 다양해져

일임형 랩의 가입 문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전에는 최소 가입 금액이 3000~5000만원인 상품이 대부분이어서 주로 자산가들이 가입했지만, 요즘에는 100만원만 있어도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이 잇따라 출시되고 있다. 우리투자증권의 셀프-초이스 랩과 동양증권의 마이 W 크레센도 랩은 최소 가입 금액이 각각 30만원, 100만원이다.

투자 대상도 주식, 채권뿐 아니라 주가연계증권(ELS), 상장지수펀드(ETF) 등 다양해지고 있다. 매월 적금을 붓듯이 ELS나 ETF를 매수할 수 있는 상품이 인기가 많은 편인데, 투자 위험이 높지만 기대 수익률이 높은 금융상품에 소액으로 분산 투자할 수 있어서다.

요즘에는 배당주에 투자하는 랩으로 돈이 몰리고 있다. KDB대우증권의 배당성장지수 랩은 지난 8월 출시된 이후 한 달여 만에 60억원이 들어왔다. 한국투자증권의 아임유 고배당주 랩도 최근 5개월간 150억원 이상을 끌어모았다. 내년 세법개정안에 따르면 배당 투자를 펀드가 아니라 랩으로 하면 세제 혜택을 받게 될 전망이다. 기획재정부는 개인 소유의 계좌로 배당주에 투자하면 배당소득 원천징수세율을 14%에서 9%로 낮춰서 적용받거나, 금융소득종합과세 분리과세(25%)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자문형 랩 찾는 발길 끊겨

2011년 시중 자금을 거의 휩쓸다시피 했던 자문형 랩은 잊혀가고 있다. 자문형 랩의 잔고는 2011년 7월 말 17조3890억원 규모였지만 올해 7월 말 기준으로는 7조2648억원이다. 3년 동안 10조원 넘는 자금이 빠져나간 것이다. 계약 건수도 2300건에서 1150건으로 줄었다. 한때 소수 종목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좋은 성과를 냈지만, 이 투자 방식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