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7년(1552)에 소수서원 다음으로 세워진 서원으로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었다.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년(1552)에 지었다. 명종 21년(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남계서원은 큰길가에 넓다란 공터를 두고 위치해 있다. 홍살문 옆에는 최근 것으로 보이는 정여창 추모비가 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 공간을 두었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공간을 이룬 전학 후문에 배치를 하였다. 누문인 봉수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 옆으로 유생들의 생활 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재 앞에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전사청과 고직사·묘정비각 등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문화재청]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여창(鄭汝昌, 1450년-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 뒤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된다.
▲강학 공간은 평지에, 사당등 제향 공간은 뒷편 약간 높은 지형에 배치하였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이관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정여창을 배향하는 서원이 전국에 아홉 군데가 있는데, 그 가운데 남계서원이 중심을 이룬다. 정여창의 호는 ‘일두'인데, ‘한 마리의 좀’이라는 뜻이다. 정여창이 스스로를 낮추어 불리고자 지은 호로, 중국 북송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정이천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백운동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서원인데 소수서원이 건립되고 9년후인 1552년에 개암 강익과 함양 유림들의 주도로 지어졌다. 우선 향내 유림들이 쌀과 곡식을 부조하면서 건립여론을 환기시켰고, 당시 함안군수 서구연이 건립을 위한 물자와 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7년만인 1599년에 완성하였다.
1561년 모든 시설을 완비하고 일두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당시 39세의 개암 강익이 초대원장이 되었다. 남계서원은 이후 조선의 서원들이 모범으로 채택하는 '前學後廟(전학후묘)'의 배치형태를 처음으로 갖추었다. 외삼문겸 2층누각을 들어서면 강당과 동재, 서재가 모여있는 강학공간이며, 그 뒷편 야트막한 언덕위에 사당과 전사청등 제향공간을 정문부터 일직선상에 배치한 구조이다.
▲처음에는 준도문(遵道門)이라고 하는 삼문 형태의 출입문이었으나 뒤에 2층을 얹어 누각이 된 풍영루(風詠樓).
▲2층 누각은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거나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쉬기도 하는 곳이었다. 창건 당시 이름인 준도문이라는 현판이 안쪽으로 걸려있다.
누각을 들어서면 두단 높은 정면에 강학당이 있고, 한단 아래 좌우로 유생들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으며 왼쪽 전면에 서원 묘정비를 세웠는데 특이한것은 동재와 서재 앞쪽 한 단 아래에 2개의 못을 파 연꽃을 심었으니 유난히 연꽃을 좋아했다는 정여창 선생이 생각난다.
▲누각에서 바라 본 강학공간. 정면에 보이는 것이 강당이고 한단 아래 좌우 대칭형 건물이 유생들 기숙사인 동재, 서재이다. 그앞으로는 서원 묘정비가 비각안에 세워져 있다. 사당은 강당 뒷편 언덕에 있는데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강당은 명성당(明誠堂)이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에는 단칸 온돌방인 구조이다.
▲사액서원임을 써놓은 현판. 사액은 명예일 뿐 아니라 전답과 노비가 하사되는 등 경제적인 이점이 크다.
▲좌, 우 단칸방은 각각 거경(居敬), 집의(集義)로 이름지었는데 오른쪽이 원장 방인듯 싶다. 뒷면에서 보면 오른쪽 방은 뒷편으로 개흘레를 내달아 같은 구조이지만 넓은 공간이 되도록 배려하였다.
▲동재, 서재는 2칸 건물로 단칸방과 한단 아래로 걸쳐진 누마루 형태의 마루로 되어 있는데 원생들이 기거하기에는 좁아보인다. 통상 동재에 선배, 서재에 후배가 머문다고 하며, 동재는 양정재(養正齋), 서재는 보인재(輔仁齋)라고 지었다. 또한 연꽃을 좋아했다는 정여창 선생을 기려서인지 그 아래에 각각 작은 연지를 꾸몄고 동재 누마루를 애련헌(愛蓮軒), 서재 누마루를 영매헌(詠梅軒)이라 이름 지으니, '연못을 파고 못 옆에 둑을 쌓아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읊조릴만하다'라는 뜻이다.
▲서재 앞쪽 비각에는 묘정비가 있다. 서원 건립이후 송덕비가 없어 아쉽던 차에 건립 200년이 지난후인 1779년에 세웠다.
▲묘정비는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알수없지만 지붕돌이 보기드문 형태와 채색으로 눈길을 끈다.
▲강당 오른쪽에는 장판각(경판고)이 있다. 서원의 책이나 판각을 보관하는 곳인데 중요서적은 박물관으로 옮겼다.
이렇게 '전학후묘(前學後廟)'에서 전학(前學)에 해당하는 강학공간은 단순하게 지어졌다. 후묘(後廟)에 해당하는 제향공간은 강당 뒷편의 얕으막한 언덕위에 지어놓아 계단을 올라가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야 한다. 사당에 올라서면 아랫쪽 강학공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멀리 앞산과 서원앞을 흐르는 남계천까지 조망이 시원하다.
▲강당 뒷편 계단을 올라가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다.
▲내삼문은 작은 지붕을 씌워 일정한 공간을 만든 구조이며 그 안쪽으로 정여창 선생과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세분을 모신 사당이고, 오른쪽은 제사집기등을 보관하는 전사청이다.
▲높은 지형의 사당에서 내려다 본 전경... 서원 전체는 물론 앞산, 들판, 남계천이 한눈에 보인다.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고직사, 실제로 거주자가 있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지어진 남계서원, 전학후묘의 구조를 모범적 형태로 정착시킨 서원이지만 생각보다 단순하며 검소하다. 또한 넓은 평지에 자리잡았으면서도 얕은 언덕에 접하여 사당을 위로 올린 모습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착한 모습이다. 다만 서원 앞 공터가 너무 넓고 어수선하여 잘 정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청계서원. 정문은 누각이 아닌 삼문형태이며 강학공간은 남계서원과 비슷하다. 사당은 보수공사중이었다.
남계서원 바로 옆에는 탁영 김일손을 모신 청계서원이다. 원래 김일손 선생이 1495년 청계정사를 열어 수학(修學)하던 곳이었으나 1498년에 역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참형 된 후 폐사되었다가 1917년 남계서원으로부터 대지를 기증받아 1921년 준공하였으며 그후 최근까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렀는데 전체적인 구조나 배치는 남계서원과 비슷하다.
▲정여창의 묘, 윗쪽은 부인묘이다.
▲정여창 생가, 솟을대문에는 효자, 충신 정려패가 다섯 개 걸려있다.
원래 정여창은 경남 하동사람이나 증조부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그를 기리는 남계서원이 수동면 원평리에 있고 서원 뒤 산가슭, 하동정씨 공원에 묘가 있는데 그곳은 승안사 절터이기도 하며 정여창의 생가는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는데 이 마을은 한옥 전통마을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빼곡하게 들어선 고가들이 멋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