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칠월 도토리

신기한 일이다. 도토리를 주울 철도 아니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직 팔월인데 밤이 떨어질 일도 없다. 아침마다 운동 삼아 걷는 둘레길 산비탈에 사람들이 하나둘 엎드려 무언가 줍고 있다. 지나가던 산림 지킴이가 내려오라고 소리 지른다. 울긋불긋 꽃 바지를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두 사람이 주춤주춤 내려오기는 하는데 영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다.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다시 누군가 산비탈에 엎디어 무언가 줍고 있다. 모를 일이다. 궁금증이 폭발하고 만다. ‘아줌마! 뭘 주우세요?’ 대답이 없다. 이왕 묻기 시작한 거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러 본다. 뭐라고 웅얼거리긴 하는데 들리지 않는다. 이쯤 되면 그냥 물러나고 말아야 한다. 그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집에 돌아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 농사 스승님을 만났다. 궁금증을 풀 좋은 기회다 싶어 둘레길에서 본 것을 이야기했더니 ‘ 아! 거? 칠월 도토리 줍는 거여’ 그러곤 휙 내려가 버리신다.

칠월 도토리라... 처음 듣는 이야기다. 분명 음력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내 상식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서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낸 것. 음력 칠월에 떨어지는 도토리가 있었다. 바로 신갈나무 도토리다. 모양새는 털옷을 입은 것 같다. 그래서 도토리가 반 이상을 깍정이에 파묻힌 채 떨어진다. 비슷한 모양의 도토리 중에서 가장 큰 도토리라고 한다. 음력 칠월에 떨어지는 도토리라서 가을이 되면 이미 벌레가 먹거나 썩어 버린다고 한다.

가을이 깊은 어느 날. 음력 칠월에 떨어져 용케 살아남은 신갈나무 도토리는 뿌리를 내린다. 말이 좋아 가을이지 찬바람은 불고 햇살이라곤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을 11월이다. 나무마다 그 곱던 단풍잎들을 다 떨어뜨릴 때다. 그 덕분일까? 다행히 하늘은 조금 더 열려 있으니 햇살 한 줌쯤 더 받을 수 있게 된 날. 찬바람에 그 약간의 햇살마저 얼어버릴 것 같은 그런 날. 신갈나무 도토리는 뿌리를 땅속에 내린다. 그리고 긴 겨울을 난다. 참 끈질긴 생명력이요 번식력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최종 목표는 번식이다. 그러니 도토리도 여물어 번식해야 한다. 그 전에 어떻게든지 살아남아야 한다. 날아다니는 새나 나무를 오르내리는 작은 동물들에게 먹혀서는 안 된다. 벌레나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나무에 달린 동안엔 푸른색이다. 나뭇잎과 같은 색이어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에 취해있는 동안 그들은 처절한 삶의 투쟁을 하고 있다.

도토리를 살펴보면 어는 종류의 도토리나 깍정이가 몸통 반쯤은 둥글게 싸고 있다. 바닥에 떨어질 때 충격을 최소화시키려고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도토리도 세상살이가 둥글둥글 모가 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이리저리 굴러야 하는 인생인 것을.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자리 잡고 뿌리가 내리기까지는 어디를 어떻게 굴러다닐지 모르는데 모가 나 봐야 저만 상처 입고 멍이 들 뿐인 것을 아는 탓이다.

어디 도토리만 그런가.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열매는 둥글다. 빛깔과 향기야 다 제각각이지만 자기들의 최종 목표인 번식을 위해서 둥글게 살아야 함을 알고 있다. 둥글어야만 새들이나 다람쥐들에게 먹히기 좋고, 혹은 상처 없이 굴러서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필요한 방식임을 안다. 그래서일까? 현인들은 늘 둥글게 살라고 가르친다. ‘모난 놈이 정 맞는다.’고 했다. 한 세상 살면서 너 나 없이 둥글둥글 살면 이 세상 참 살 맛이 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