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따뜻함이 그리워지며 옛것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세월이 흘러도 추억은 가슴속에 남는 법. 손때 묻은 옛 물건을 보며 그날의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류가 살아가는 데 크게 기여한 이기(利器)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나라에도 성쇠가 있듯이 한때 각광을 받으면서 인류문명에 획기적인 도움을 준 발명품들이 역사 속으로 묻혀버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자연의 빛만으로 살던 오랜 옛날, 백열전구의 등장으로 어둠 속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저효율 조명기구로 낙인이 찍혀 올해부터 생산과 수입이 중단되었다. 대체품인 LED(light emitting diode) 램프로 점차 교체한다고 한다. 백열전구 대비 수명은 50배, 전기요금의 80% 이상 혜택을 본다니 백열전구인들 별수 있겠는가. 주산(珠算)이 전자계산기가 나옴으로써 이미 사라졌고 유선전화도 휴대전화의 편리함에 일반 가정에선 집 전화를 없애는 추세다.
글자를 찍어내던 타자기도 컴퓨터에 밀려 존재 가치를 잃은 지 오래다.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 이후 처음 영문타자기인 경방공업주식회사의 클로버와 동아정공이 마라톤을 만들었으나 1996년에 생산이 중단됐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아 있던 타자기 공장인 인도의 ‘고드레지&보이스’(Godrej&Boyce)가 2011년 문을 닫았다. 1867년 미국에서 처음 타자기가 발명된 지 144년 만이다.
1950~60년대 우리나라의 사무 장비 혁신을 주도해온 타자기는 숙달된 젊은 여성들이 취업 전선에 진출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국가기술직 타자자격시험에 100만 명이 몰릴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던 것이 컴퓨터의 물결에 밀려 1995년에 사라졌다.
타자기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철판에 유리종이를 올려놓고 철필로 글씨를 써서 그 유리종이를 등사기에 끼워 갱지(更紙)에 프린트함으로써 많은 서류나 시험지를 작성했다. 이젠 컴퓨터도 점차 이동이 간편한 노트북과 태블릿 PC, 스마트폰에 점유율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계문명에 인간의 두뇌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컴퓨터가 나오기 전 나는 타자기 하나를 구입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전이니 대략 30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세운상가에서 구입한 경방공업이 만든 영문 타자기다. 나는 영문 타자기가 갖고 싶었다. 20대 초 나는 군대 가기 전에 호주의 몇몇 여성과 펜팔을 맺어 보잘것없는 영어 실력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금은 펜팔이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그 시절에는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호주 동남쪽의 큰 섬인 태즈메이니아(Tasmania)의 여성 몇 명과 여러 해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태즈메이니아에 있는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펜팔을 맺고 싶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타자기로 찍어 편지를 보낼 때도 있으나 나는 손으로 썼다. 국가 경제가 전후 폐허 속에서 호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나니 타자기를 갖는다는 건 한낮 꿈일 따름이었다.
내가 월미도 미군 헌병대에 있을 때다. 근무현황을 총괄 지휘하는 엠피 데스크(MP desk)라는 곳에서 야간 근무 중, 그곳 타자기에서 독수리타법으로 타자를 쳐 글을 쓴 기억이 난다. 당시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우리의 생활상도 알수 있다.
지금 식당에 휴지가 필수품처럼 비치되어 있다. 그 당시 호주 여성이 자기 나라 어느 식당의 냅킨을 곱게 접어 편지 속에 넣어 보내왔다. 나는 그 물건이 처음 보는 거라 무엇에 쓰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의아한 듯 그것의 용도를 알았어야 했을 텐데 하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존심도 상하고 씁쓸하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의 국가 경제력이 호주를 앞질렀으니 실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 그들은 70대의 고령이 되었을 것이다. 살아 있다면 은퇴하여 복지혜택을 누리면서 유유자적 여생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자기는 한번 잘못 치면 컴퓨터와 달리 없애거나 고칠 수가 없다. 다량을 찍어낼 수도 없다. 능률 면에서 컴퓨터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나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정감을 느낀다. 둥근 손잡이를 돌려 종이를 끼울 때 따르륵하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뇌 속의 잡념이 없어지고 집중력이 생기는 순간이다.
자판을 때릴 때마다 철자막대가 벌떡벌떡 일어나서 철컥철컥 글자를 찍어낸다. 한 줄이다 차면 땡 소리가 들린다. 그때 리턴 레버를 돌리면 철커덕하고 새 줄로 변한다. 타자기 특유의 소리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잉크 냄새도 싫지는 않다. 오히려 신성함마저 느낀다. 타자기로 힘차게 자판을 두드리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종이 위에 활자가 숨을 쉬는 듯 찍힌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소리 없이 모니터에 찍히는 밋밋하고 무미건조한 컴퓨터 활자에선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옛 물건을 볼 때 사람들은 향수를 느낀다. 그러기에 박물관을 만들어 고품을 전시해 사람들의 그 마음을 달래주기도 한다. 현대 문명 속의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롭고 간편함을 느낄 수 있겠으나 반사적으로 오는 삭막함이나 박탈감은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옛것을 잊지 말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이제 문명의 뒤안길로 밀려난, 선반 위에 손때 묻은 타자기를 보면서 그 옛날 자판을 치며 삼매경에 빠졌던 옛 추억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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